나는 운명을 믿는다. 오래전부터 운명은 실재한다 믿어왔으며, 따라 사주나 관상도 어느 정도는 믿는 편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 운명은 당사자가 알게 되는 순간 그 길을 바꾼다. 예를 들어, 한 무당에게 자신의 운명에 관해 물은 사람이 있다고 쳐보자. 그는 화재로 죽을 운명이지만, 운명을 그다지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이 무당에게 ‘불을 조심해야 해’라는 말을 들으면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을 사용할 때면 떠오르는 무당의 말에 좀 더 몸을 사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는 화재를 피해가고, 다시 안정적인 삶을 되찾는다. 개인의 의지가 운명을 틀어놓은 것이다. 운명은 가장 나쁜 경우로 정해져 있다. 이를 바꾸는 것은 인간의 몫이고, 여기에는 어떠한 방식이든 노력이 필요하다. <참 삶의 길>에는 사람이 잘살기 위해, 자신이 바라는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분야가 서술되어 있다.
책에서 인간은 세상에 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본성이 있으며, 이 본성을 표출하고 개인의 성취, 만족을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서술되어 있다. 내게는 이것이 운명과 다름없는 문장으로 느껴졌다. 본성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에 관해 묻는다. 운명은 앞길에 정해진 불행이 있다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관해 묻는다. 세상에는 범죄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인간도 분명 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범죄자가 되어 살아가지는 않는다. 반면, 선행을 베풀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범죄자가 되어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결국 운명이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정해져 있다면, 이를 바꾸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본성에 따른 의지와 행동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운명과 본성을 알아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인생에 주어진 과제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 내게 로봇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을 묻는다면, 나는 인간은 다른 사물과 달리 본질을 알기 전에 존재하게 된다는 점을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