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 최초 등록일
- 2009.02.28
- 최종 저작일
-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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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문학-한국 한시사 수업시간에 발표한 김시습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 관련된 리포트입니다.
목차
1. 김시습의 생애
2. 시대 상황
3. 김시습의 방외인적 성격
4. 김시습의 시세계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평생 방외인으로써 세상에 저항했던 김시습의 번민과 방황이 그의 시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김시습의 생애
매월당 김시습은 1435년에 서울 성균관의 북편 마을에서 지체가 그리 높지 못한 무신계 가계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적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할 만큼 어려서부터 재능이 놀라워 기대를 모았다. 1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시험에 대비한 공부를 하던 중, 서울을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세조의 왕위찬탈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사흘 동안 방안에 박혀 있다가 통곡을 하며 책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는 미친 듯 뒷간에 빠지기도 하다가 정처 없는 방랑길에 나섰다.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이로부터 그는 10여 년 간 전국을 유람하면서 중의 행색을 하고 다녔다. 31세 때에는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6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금호신화』는 이 시기의 소산이다. 37세 때 친구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와 수락산 기슭에서 자리 잡고 살았는데 서울 근처에서 생활한 12년 동안 그는 갖가지 기행을 저질러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당시의 영의정 정창손이 행차하는 것을 보고 "이놈아, 그만 물러 나거라"고 소리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47세에는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환속하여 재혼까지 하게 되지만 곧 다시 출가해서 관동 지방을 전전하다가 결국 1493년 59세에 충청도 무량사에서 눈을 감았다.
2. 시대 상황
15세기 전반기의 우리나라 사회는 신생 조선왕조의 체제가 안정되어 보다 정비되고 발전된 제도 하에서 생산력이 발전하고 민족의 전통문화가 개화한 시기였다. 그런데 그 후반기로 들어오면서 조선조 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차차 드러나고 있었다. 즉, 과전법 체제의 붕괴 이후 훈구 귀족들의 대토지 점유와 공역(貢役)의 과중으로 양인 농민층이 급격히 몰락하여 사노비로 전락하든가 아니면 도산 유리하는 추세였다. 국가의 존립 기반인 양인 농민층을 확보 안주시키지 못함으로써 결국 국가는 재정적․군사적으로 허약해 갔던 것이다.
한편 세조의 유교적인 명분을 배반한 왕위 탈취사건 및 그 후 훈구 집권층의 탐욕 무능으
참고 자료
-임형택,『한국문학사의 시각』, 창비, 1984.
-송재소,『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네』, 한길사, 2005.
-정병욱,『한국고전의 재인식』,홍성사,1979.
-조동일,『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