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청계천에 대한 역사적 변천과정에 대해서 많은 자료를 참고하여 조사하였습니다.ㅎㅎ
목차
1. 서언
2. 조선시대 이후 청계천의 변화과정
(1) 조선시대 태종,세종대의 변화과정
(2) 조선시대 영조대의 변화과정
(3) 일제 강점기 및 광복 후의 변화과정
(4) 청계천의 복원과정
3. 청계천 복원의 현재적 의의
4. 결언
5. 참고문헌
본문내용
세종 26년(1444) 집현전 수찬인 이선로(李善老)는 개천에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도록 금지해서 물이 늘 깨끗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 이전부터 사람들이 개천을 생활하천으로 인식하여 오물을 버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견에는 영의정 황희(黃喜), 우의정 신개(申槩)도 찬성하였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이치에 어긋나는 풍수설을 근거로 백성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고, 그 대표적 인물은 집현전 교리 어효첨(魚孝瞻)이었다. 어효첨은 풍수설을 근거 없이 백성을 현혹하는 이단의 설이라고 주장하며 국가의 일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도읍지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쌓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더러운 것을 흘려보낼 넓은 시내가 있어야 도읍이 깨끗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개천을 백성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생활 하천으로 사용하자는 의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광권, 위의 글, 2005, 73~74쪽
이러한 대립에서 결국 세종대왕은 어효첨의 의견을 받아들여 개천을 생활하천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민본정치를 추구했던 세종으로써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 사건은 조선이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유교 통치 이념과 체제를 구축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나, 이러한 생활 하천으로의 이용은 약 300년 이후의 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준천 사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단서를 제공했다는 한계점도 가지고 있다. 조광권, 위의 글, 2005, 76쪽
조선 전기인 태종과 세종의 준천 사업은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태종대에는 초기에 대규모 공사들이 계속됨으로 인해 적극적으로 준천공사를 시행할 수는 없었지만 현실적인 피해가 누적되면서 준천 사업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준천 사업은 부분적으로만 진행되었고, 다음의 세종대에 와서도 그 피해는 계속되었다. 따라서 세종대의 준천 사업은 전대의 공사들을 보수ㆍ확대하면서 진행되었다. 그 후에는 풍수지리설에서의 명당수 기능과 유교적 왕도정치를 바탕으로 한 생활하천의 기능이 서로 대립하였고, 결국 생활하천의 기능이 받아들여져 이후 조선의 준천 사업에서 기준이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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