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왕의 그림자 vs 권력의 조율자
- 최초 등록일
- 2009.01.19
- 최종 저작일
-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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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 중국을 찾아서를 읽고 환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서 그부분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였습니다. 강의에서 A+을 받았으며 환관의 역사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서술했습니다.그림까지 삽입라고 열정적으로 작성했습니다.
목차
첫째마당 - 저자 / 옮긴이 소개
둘째마당 - 서론
셋째 마당 - 본론
넷째 마당 - 결론
본문내용
하지만 장태후는 깊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왕진은 기다리면 반드시 권력을 잡을 날이 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마침내 장태후가 죽자 왕진은 제일 먼저 주원장이 세운 환관의 정사 간여를 금지시킨다는 내용의 철폐를 없애버렸다. 그의 힘은 모후인 장태후를 능가하였고 황제조차 그를 어쩔 수 없었다. 그 무렵, 몽고족이 자주 명나라를 침범해 왔으며 왕진은 영락제가 직접 몽고족을 응징한 것을 예로 들며 영종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 할 것을 요청했다. 결국 왕진의 압력으로 전장에 나갔다가 몽고군에게 포로가 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 전장에서 금위군 군관 번충이 분통을 떠트리며 왕진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영종은 포로에서 풀려난 이후 반성의 기미도 없이 왕진을 위해 사당을 지어주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도한 명 말기인 희종시대에는 위충현(魏忠賢)이 나타나 망국으로 몰아갔다. 위충현은 만력제의 아들 후궁 밑에서 음식 시중을 글면서 영리하게 권좌에 올랐고, 그 후 1620년대에는 만력제 손자의 궁중생활을 거들었다. 이후 위충현은 동창을 장악해 환관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결국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유학자들이 중심이 된 동림당(東林黨)세력이 조직적으로 위충현에게 대항을 했으나, 그에 대한 보복으로 위충현은 궁중에서 한 고관을 때려 죽였는데도 황제가 위충현을 문책하지 않았다. 황제의 암묵적 승인으로 더 대담해진 위충현은 인단의 궁중 관료들은 1624~1627년에 걸쳐 동림당원에 대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자살하게 만들었다. 동림당까지 무너지자 위충현의 힘은 황제를 능가하게 되고, 황명까지 자기 마음대로 써서 내렸다. 희종은 그런 위충현에게 사당까지 지어주기도 했는데 사당이 한창 지어질 때 희종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희종이 죽고 그의 아우 숭정제 사종이 즉위했다. 사종은 즉위하자마자 환관들을 몹시 싫어해 위충현을 지방으로 쫒아버리고 이에 절망한 위충현은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에 이르게 된다.
참고 자료
조너선 D.스펜스 저, 김희교 역, 현대중국을 찾아서1(이산,2007)
박영규 저, 환관과 궁녀(김영사,2004)
신승하 저, 중국사 상하(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장희옹 저,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경인문학사,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