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과 루쉰의 아Q정전
- 최초 등록일
- 2009.01.10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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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과 루쉰의 <아Q정전> 통해서 보는 어리석음과 지혜에 대한 리포트.
목차
1. 에라스무스가 말하는 어리석음의 유용성을 텍스트를 바탕으로 열거해 보십시오.
2. 에라스무스가 생각하는 진정한 지혜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3. 아큐가 어떤 폭력에도 자신의 승리를 확고하게 믿는 동기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4. 두 작품을 통해 어리석음과 지혜가 어떻게 나누어지며, 어떤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인지에 대해 두 텍스트를 바탕으로 토론해 보십시오.
본문내용
그렇다면 지혜로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 에라스무스가 말한 대로 최고의 선, 즉 신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그를 추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혜로움의 유무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그러한 ‘지혜’를 설파했던 것은 당시의 사회적,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루쉰이 아큐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어리석음은 당시 중국인들이 처해있던 상황에서 중국인들이 현실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에라스무스와 루쉰의 공통점은 바로 당시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스스로의 허례허식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을 비판하려 했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삶이란, 어떤 어려운 사상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고행하는 것이 아니라 위의 작가 두 사람과 같이 자신이 처해있는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정확히 인식하고 자신이 인식한 바에 따라 실천에 옮기려는 삶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아까 언급했던 지혜와 어리석음의 상대적인 개념과 모순되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과연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기준을 두고 보아도 ‘절대적으로’ 지혜로운 삶이 아닌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살기위한 노력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찬양하고자 했던 복음적 인문주의가 현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지혜롭지 못했던 지식인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는 당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분명히 제시했고 그것을 추구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우신예찬>, 에라스무스
<아Q정전>, 루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