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현진건의 <무영탑>을 연구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2.1.현진건과 작품 <무영탑>
2.2.<무영탑>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2.3.<무영탑>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2.4.<무영탑>의 가치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현진건의 <무영탑>은 동아일보에 연재된 역사소설이다. 시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자체 내 구조적 모순으로 문화적 상승과는 역행하여 정치적 하강의 길을 걷던 경순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진건은 이런 정치적 하강기에 처한 신라의 모순을 작품화함으로써 일제 강점하의 우리 민족의 식민지 질곡을 인식시키고 그를 통한 깨달음을 촉구하고자 했다. 즉 그는 식민지 정책이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사회와 민족에 대한 이데올로기 의식을 바탕으로 전반적 모순을 파악해내면서 특히 사회계층의 양극화 현상과 하층계급의 불행을 주시했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심화, 확산되어 식민지 사회의 허위를 파악하는데 주력하였다. 본고에서는 이와 관련해 현진건의 생애와 작품 활동을 알아보고, 그의 사상이 어떻게 <무영탑>에 드러나 있는지 살펴보겠다.
Ⅱ. 본론
2.1.현진건과 작품 <무영탑>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은 근영문학의 선구자로서 단편소설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공로자로서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차근차근하게 제 주위를 관조(觀照)하고 고요하게 제 심장의 고동하는 소리를 들을 때 이것이야말로 우리 문학의 운명인 줄 안다.’ 이 같은 성실한 문학적 자세로 임했던 현진건은 1900년 9월 9일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 정건은 상해 임시정부시대의 대한청년단 간부로 싸우다가 일경에게 붙잡혀서 옥사했고, 그 비보를 들은 형수는 자결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자란 현진건은 어린 시절부터 항일사상에 불타고 있었다. 16세의 현진건은 결혼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성성중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형님을 찾아 상해로 가서 호강대학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다. 귀국 후 20세의 젊은 나이로 문학 수업을 시작했다. 현진건은 3.1운동 다음해 1920년 무렵에 『백조』의 동인이 되어 당숙 현희운의 소개로 『개벽』 1920년 10월호에 처녀작 <희생화>를 발표함으로써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현진건은 작가로서 뿐 아니라 신문기자로도 뛰어난 명성을 떨쳤지만 1936년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인책되고 투옥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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