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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이현보(李賢輔)의 생애
Ⅱ. 사화 - 당시의 정치 현실
Ⅲ. 이현보의 문학세계는 어떠하였는가?
1. 이현보와 한시
2. 이현보의 국문시가
Ⅳ. 정리하면서 - 이현보 한시의 표현 특성
Ⅴ.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이현보(李賢輔)의 생애
농암(聾巖)이현보는 세조 13년(1467) 7월 19일 태어나 명종 10년(1555)까지 89세로 생애를 마친 당대의 명신(名臣)이요 문신이요 시인이었다. 자(字)는 비중(仲), 호는 농암(聾巖)또는 설빈옹(雪翁)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농암은 태어나면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골상이 비범하였다. 특히 성품이 호탕하여 사냥을 좋아하고 학문에는 힘쓰지 않았는데, 19세에 향교에 들어가고, 20세에는 홍귀달(洪貴達)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경전을 배우게 되면서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학문에 힘을 쏟았다.
29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32세에 문과에 급제, 교서관권지부정자(校書館權知副正字)에 제수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36세에는 사관으로서 임금의 언동을 기록해야 하는데 항상 멀리 떨어진 곳에 엎드려 있어서 임금의 언동을 명료하게 알 수가 없으므로 불편하니 탑전(榻前)에 가까이 가서 기록할 것을 소청해 연산군의 미움을 샀다. 2년 뒤 38세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1504)를 당하여, 김굉필(金宏弼) 등이 숙청을 당하는 위기의 순간에도 세자가 독서에 마음을 쓰지 않음과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상계(上啓)했다가 의금부(義禁府)에 갇혀 안동의 안기역(安奇驛)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12월 직필로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의금부로 이송되어 70여 일을 옥에 갇혀 사지(死地)에 이르게 되었는데, 연산군이 석방자를 지목하는 과정에서 농암의 바로 위에 적힌 자를 지목한다는 것이 잘못 지적하여 기적적으로 방명(放命)되는 요령을 얻었다. 40세인 1506년엔 중종반정이 일어나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조정(朝廷)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42세에는 어버이는 위해 외직(外職)을 청하여 영천군수가 되었고, 44세에는 명농당(明農堂)을 지어놓고 벽에 진나라 도연명의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려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담았다. 46세에 어버이를 위해 농암 위에 애일당(愛日堂)을 건립하여, 양친 부모를 당상에 모시고 자손이 앞에 가득하고 향중에는 나이 높은 노인이 많으니 일찌기 구로회(고을 마을 사람 중 70세 이상인 아홉명을 모아 만듦)를 열어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47세에 내직으로 옮기고, 그 다음 해에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었으며, 52세에 안동부사를 지냈고, 55세에 내직으로 옮겼다가 56세에 충주목사, 그 다음해에 성주목사가 되었다. 59세에 어버이가 늙었음을 들어 해관(解官) 귀향(歸鄕)했으나 곧 입조(入朝)하였고, 62세에 귀성했다가 곧 대구부사가 되었으며 다시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해직했는데, 그 이듬해에 평해부사, 그리고 이어서 영천군수가 되었다.
참고 자료
김수선(1995), 농암 이현보의 시문학 연구, 성산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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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조학회(1986), 고시조작가론, 서울 : 백산출판사.
이원주(1991), 한국문학작가론 - 이현보론, 서울 : 현대문학사
여기현(2001), 한국고전문학이해 - 농암 이현보 한시의 표현 특성, 윤철중, 서울 : 보고사
김홍규, 문학과 역사 - 강호문학과 정치현실, 서울 :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