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의 대응
- 최초 등록일
- 2008.12.15
- 최종 저작일
-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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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방 이후 신탁통치 파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을 정리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모스크바 3상회의 왜곡보도와 반탁운동의 발발
3. 신탁통치 파동에 대한 미군정 대응
1) 미군정의 여론공작 - 존스톤의 박헌영 기자회견 사건
2) 타스통신 보도
4. 미군정 반탁의 성격과 신탁통치 파동의 역사적 의미
본문내용
1. 들어가며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저서에서 1948년 단독정부 수립 이전부터 한국 사회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인해 두 편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것을 미국과 소련이 더욱 강화함으로써 사실상의 분단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Cumings,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1, p. 262
하지만 그는 한국 사회가 그렇게 둘로 나뉘게 된 원인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없이 결과만을 서술함으로써 해방정국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 사회가 좌․우 대립의 이분법적 논리에 휘말리게 된 결정적 계기인 신탁통치와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에 대해서 서술해보고자 한다. 신탁통치에 대한 내용이 한국 사회에 어떤 식으로 왜곡되어 전해졌는지, 또한 이것을 미군정이 어떻게 그들의 목적에 이용했는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신탁통치가 가지는 현재성에 대해서도 이 글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모스크바 3상회의 왜곡보도와 반탁운동의 발발
1945년 12월, 3상회의 결정의 한국 관련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자 국내에서는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국내에 반탁운동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3상회의의 한국 관련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머리기사였다. 이 기사는 3상회의 당시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왜곡보도였다. 당시 미군정은 엄격한 검열제도를 시행했고 특히 남한에서 외부로 나가는 보도기사는 사전에 철저히 검열했다. 김민환, 「미군정의 언론 정책」, 『언론과 사회 제 8호』, 1995, pp. 11~13
그러나 동아일보의 이 왜곡기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이 기사는 반탁운동을 격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며칠간 3상회의와 그 결정내용에 대한 국내 신문의 보도태도와 보도방향을 결정했다. 신문 등 언론을 통해 분출하기 시작한 반탁열풍은 시위, 철시, 동맹휴학 등 대중운동으로 급속히 발전했고,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반탁운동 열풍에 미군정도 아연 긴장했다. 특히 3상회의 결정의 국내 전달 이후 반탁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연말연시 며칠간에는 한국인들의 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하지 장군과 군정장관 아놀드는 29일 기자회견과 정치지도자 영수회담을 열어 한국인을 진정시키고 언론의 오보를 지적하면서 3상회의 결정내용을 해설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참고 자료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Cumings,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1.
김민환, 「미군정의 언론 정책」, 『언론과 사회 제 8호』,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