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해외 유학생 최치원은 신라에서 왜 중용되지 못했을까?
- 최초 등록일
- 2008.12.12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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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통일신라시대 인물인 성공한 해외 유학생 최치원이 왜 신라에서 중용되지 못했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의 생애를 통해 이유를 알아보고 평가하였다.
목차
제목 : 성공한 해외 유학생 최치원은 신라에서 왜 중용되지 못했을까?
Ⅰ. 문제제기
Ⅱ. 탄생과 가계
Ⅲ. 유년기와 소년기
Ⅳ. 청년기와 장년기
Ⅴ. 노년기와 말년기
Ⅵ. 평가
본문내용
Ⅰ. 문제제기
최치원은 우리나라의 문학을 연 첫 대가로 꼽힌다. 학문으로는 유불선 3교에 달통했고 주옥같은 명시와 명문을 남겼다. 그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당에 유학을 가서 6년만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고 내란시 토벌군 사령관의 종사관이 되어 특유의 명문장으로 반란군 진압과 민심 회유에 크게 기여하였다. 스물 여덞 되는 해에 조국으로 귀국하여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지만 망국의 길을 걷고 있고 조정이 어지러워 그의 높은 경륜을 펴 보고자 함이 가로막히고 흔적 없이 돌아가셨다. 신라의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며 왜 그가 신라에서 그 뜻을 펼쳐보지 못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Ⅱ. 탄생과 가계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해운. 아버지는 견일로 숭복사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신라 때에 둔 육부의 하나)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와 매탄사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이라 하고, 5두품이나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 고운은 풍채가 아름답고 어릴 적부터 정민하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당나라 유학전에 대한 자료가 없으나 글로 미루어 보아 총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신라의 신분사회는 골품제도로 혈통에 따라 신분을 나누어 왕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귀족은 육두품·오두품·사두품으로, ,,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