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소현세자의 재조명
- 최초 등록일
- 2008.12.06
- 최종 저작일
-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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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의 외교정책과 소현세자의 친청 정신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상을 알아보고
그들이 정권을 잡았다면 조선 사회가 어떻게 변했을까를 재조명해 본 글.
목차
1. 서론
2. 본론
1)광해군의 정책
2)소현세자의 친청 정신
3) 광해군의 정책과 소현세자의 정신의 의의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서론
조선은 유교의 나라이다. 유교 사상의 특징 자체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조선의 국가 정책들은 대부분이 명분을 중시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외교정책이다. 조선의 외교정책은 친명배금 정책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그 중심에 청나라가 있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의 새로운 주인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조선은 쇠퇴해가는 명나라를 단지 명분 때문에 계속하여 따르는데 이러한 명분 중심 정책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광해군과 소현세자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인조반정으로 숙청되어버린 광해군의 정책을 알아보고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두 달 만에 병사한 소현세자의 정신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아가 ‘만일 그들이 조선의 정권을 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에 대해서도 언급해보고자 한다. 또한 이를 통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한국사를 유교적인 안목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재조명 할 필요가 있음을 알리고자 한다.
2. 본론
1)광해군의 정책
광해군은 임란 당시 세자로 책봉된다. 그에게는 형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임해군은 성정이 포악하여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김경수, 조선왕조사 전, 325p ,2008, 수막새
또한 전란 상황에 훗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광해군은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광해군의 임금 자질이 부족했다는 말은 아니다. 광해군은 임란 때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정유재란(임진왜란 중 왜군의 2차 침략을 따로 부르는 말)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 조달은 물론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는 등 임진왜란 기간 동안 국가 안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광해군]-http://100.naver.com/100.nhn?docid=19222
당시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인목대비도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 받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위의 책, 322p
이로 미루어보아 광해군이 당시 세자로 책봉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참고 자료
김경수, 조선왕조사 전, 2008, 수막새
최용범,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2008, 페어퍼로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2005, 교육인적자원부
누드교과서 <국사>, 2005, 이투스
나종면, 소현세자의 죽음과 장례절차,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2008, 동방학
홍일표, 옛 인물에게서 배운다-소현세자, 대한지방행정공제회, 2000, Vol 49, No 5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