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학자 :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목사
- 최초 등록일
- 2008.11.25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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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신학자 :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목사 발제
목차
1. 들어가면서
2.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 1858-1927)목사의 생애.
※ 최병헌 목사의 선유활동(1908년. 02월. 06일 - 1908년. 03월. 10일).
3. 탁사 최병헌 목사의 신학사상
본문내용
‘한국 최초의 신학자’, ‘한국 최초의 비교종교학자’란 칭호를 받고 있는 탁사 최병헌 목사는 한국 기독교가 배출한 몇 안 되는 학자풍의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다. 최병헌 목사는 개종 이전에는 유학자로 전형적인 선비였다.
탁사 최병헌 목사는 충북 제천군 현좌면 신월리에서 최영래(崔永來)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858년(철종 9년)01월 16일 이었다. 그가 태어나던 당시는 교회사적으로 볼때 기해(己亥, 1839년)박해와 병오(丙午, 1846년)박해 이후 한 동안 천주교 박해가 잠잠하던 시대로, 천주교회는 제2의 황금기를 얻고 있던 때였다.
최병헌 목사의 부친은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유교의 전통 가문을 지켜 오던 인물이었다.최병헌 목사의 첫 인생 경험은 “배고픔”과 “추위”로 표현되는 “가난”이었다. 이 가난은 소년 최병헌에게 있어 아픈 체험이었고 극복해야 할 시련이었다. 막일에 익숙지 못한 양반의 후예였던 그로서는 가난 극복의 길은 과거 급제를 통한 관계(官界)진출뿐이었다. 이것을 위해 모욕을 당하면서도 웃집 서당에 가서 ‘동냥공부’를 하게 되었고 거의 독학으로 한학에 통달하게 되었다.
최병헌 목사는 소년 시절 충북 보은군 속리산 밑에 있는 먼 친척 최직래(崔稷來)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 생가와 양가를 왕래하였는데 20세기를 전후해서 아주 보은으로 가 양부모를 모시게 되었다. 과거 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의 꿈을 가상하게 여긴 양부모는 결단을 내려 최병헌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였다.
1880년 경의 일로,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남대문 안 회현방 상동이었는데 후에 상동교회 자리터가 되었다. 그런데 이 곳에 도착한 지 1년도 못되어 부친이 앓아 눕게 되면서 집안 경제를 자신이 꾸려 나가야 했다. 가구를 축소하여 옮긴 곳이 서대문안 정동이었다. 정동으로 이사 온 지 한 달 만에 부친은 죽고 말았다. 1881년 08월 29일 이었다. 긴 병 구완과 장례를 거치면서 가세는 더욱 기울어져 불때지 않은 방에서 냉복통을 앓으며 지내야 했다
참고 자료
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이덕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이야기』, 서울: 전망사, 1990.
이덕주․조이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서울: 도서출판 한들, 1997.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 세계』 53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