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한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서평
- 최초 등록일
- 2008.11.23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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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시한의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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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는 우선 이 소설의 제목에 집중하였다. 이 소설의 제목,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이 뒤에 알맞은 말을 덧붙이자면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왜냐 선생님의 국어시간이다.’일 것이다.
즉 화자는 학교에서 국어시간에 허생전을 배우는 과정에서 왜냐 선생, 윤수, K 등과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하고, 생각하고, 깨닫는다. 그러면서 ‘허생전’이라는 문학 작품, 그 이상의 사회와 갈등관계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학교는 사회를 이해하는 곳이자 받아들이는 곳으로 사회로 나가기 바로 전 단계에 속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학교는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 ‘학교(學校)’라는 곳을 정의하려고 할 때 학생을 주어로 하면 ‘배우는 곳’이고, 선생을 주어로 하면 ‘가르치는 곳’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배운다’, 또는 ‘가르친다’가 아니라 바로 ‘무엇을’이다. 이 ‘무엇을’은 위의 중요한 역할을 지시해 주는데, 그것의 내용은 단순한 지식, 정의, 사회적 제도, 사회적 가치 등이 있을 수 있다. 이것들은 개인에게 올바른 관념이나 사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위험한 소재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억압된 것을 주입시키고, 잘못된 것을 얻으며 받아들이는 곳. 그리고 그렇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학교는 이중적 가능성을 가진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이중적 가능성은 배움과 가르침의 내용뿐 아니라, 그것의 주체에서도 나타난다. 왜냐 선생의 경우, 허생과 비슷한 점을 많이 보인다. 18세기 후반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전환기에서 허생이 모순된 사회 현실을 꼬집으며 대안을 제시하는 것과 같이, 왜냐 선생은 혼란스러운 사회상황 속에서 허생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 꼭 투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토론식 수업이나, 학생들의 발표 태도를 잡아주는 모습에서 권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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