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해인사 묘길상탑기와 조위의 서해인사전권후를 통해 본 신라하대의 모습과 후삼국
- 최초 등록일
- 2008.11.19
- 최종 저작일
- 2008.11
- 1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900원
소개글
신라 하대의 사회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통해 어지렀웠던 신라 하대의 모습을 살펴보고 신라 호족의 발생, 후삼국의 성립에서부터 고려의 후삼국 통일의 과정까지 알아 볼 수 있다.
목차
1. 묘길상탑기와 해인사전권
1) 최치원의 <해인사묘길상탑기>
2) 조위의 <서해인사전권후>
2. 신라 말의 초적과 후삼국시대의 전개
3. 신라 말의 말세사상
4. 후삼국시대와 고려의 통일
1) 귀족세력의 반란
2) 6두품과 호족의 등장
3) 후삼국의 성립
4)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5. 질문과 답변
본문내용
묘길상탑기와 해인사전권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신라 사회는 889년(진성왕3) 이후 농민 반란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휩싸이며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거의 잃어버리자 지방 호족들이 할거하였고, 궁예와 견훤이 이들을 아우르며 독자 정권을 세움으로써 후삼국시대가 열렸다.
국내의 여러 고을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람을 보내 독촉하니 이로부터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나마 영기에게 붙잡으라 시켰더니 영기는 적의 보루를 보고 겁을 먹어 나아가지 못했으나 촌주 우련은 힘껏 싸우다 전사하였다. 왕은 영기를 목 베라 명령하고, 10여 살이 된 우련의 아들로 하여금 촌주 자리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진성왕3년)
그러나 이런 대략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던` 당시 지방 사회의 실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면,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 기록들은 곧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하지만 신라 말기의 사회상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갈 실마리 역할을 하게 될 두 개의 유물이 있다.
(1) 최치원의 <해인사 묘길상탑기>
진성여왕 9년(895) 전란으로 사망한 원혼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해인사 경내에 세운 탑이 `묘길상탑(보물 제1242호)`이다. 이 시기 신라는 농민반란과 후삼국의 성립으로 극심한 혹란에 휩싸였고 이로 사찰과 승려들까지 위협받았고, 전쟁 때 수많은 승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묘길상탑은 구체적으로는 이 승병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세웠다. 이 석탑 안에서 발견 되었다고 알려진 벽돌판 네 개 중에 하나에 최치원이라는 이름이 선명히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끄는데 최치원의 문장을 한글로 옮겨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 자료
고대로부터의 통신
한국사 콘서트
다시찾는 우리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