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치욕의 전쟁으로 알려진 임진왜란을 다시 돌아보는 레포트입니다.
많은 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전쟁을 준비한 일본과 전쟁을 예감하지 못했던 사대부
1). 전국통일 뒤의 대륙침략 준비 - 일본
2). 200년 평화 속에 드리운 나태의 그림자 - 조선
2. 전쟁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 조선
3. 의병의 활동 속 재정비를 시작한 조선
4. 수군과 의병, 관군의 협력이 일궈낸 한반도 사수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당쟁, 무능한 정부, 이순신, 거북선, 전후(戰後) 조선의 피폐(疲弊)한 모습 등이 대부분이지 않는가. 조금 더 나아간다면 권율이나 사명대사 등 뛰어난 공을 세운 장수 ․ 의병(義兵)들이 떠오를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임진왜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상(像)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은 대부분 이순신을 위시로 한 수군(水軍)에 대한 기억이다. 의병들의 활약 역시 두드러졌음에도 잘 조명되지 않으며, 특히나 육전(陸戰) ․ 육군에 관한 것들은 모두 패배로 점철(點綴)된 기억들만 남아있다. 사실은 어떠한가? 과연,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같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다’ 이다. 임진왜란은 1592(壬辰)년에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전단(戰端)이 열린 한반도에서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明) 등 동아시아 3국이 7년 동안 싸운 전쟁이다. 그 전쟁터가 조선 영토였기 때문에 승패와 관련 없이 그 피해 역시 조선이 가장 컸지만, 이 전쟁은 조선의 최후 승리로 끝났다. 7년 동안의 전쟁에서 조선이 패퇴한 것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임진왜란 때 조선 육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패퇴한 짧은 기간의 기억이 전부이다. 전쟁 초기, 20일 만에 수도를 내주고 두 달 만에 평양까지 내줬던 그 기억을 넘어 우리는 임진왜란을 제대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기간 중 기록으로 채집되는 단위 전투는 대소(大小) 약 1백 5회로 집계되고 있다. 이 중 조선군이 공격전을 벌인 전투가 68회, 방어전이 37회로 2대 1로 조선군이 공격적이었고, 조선군 측의 승리가 65회, 패배가 40회로 조선군의 우세로 나타나고 있다. 승전 65회의 전투 중 조선군 단독전이 31회로 압도적이며 조 ․ 명 연합전이 7회, 의병의 참전 아래 관군이 주도한 전투가 9회, 그리고 의병 단독전투는 12회, 관군의 참전 아래 의병이 주도한 전투는 6회였다.
이렇듯 개전 초기를 제외하고는 조선군 측이 공격적이었고 우세했으며 조선의 관군이 전쟁을 주도했는데도, 기이하리만큼 조정과 관군의 역할은 매도되고 무시되어 왔으며 이순신과 거북선, 나아가 의병과 명군(明軍)만이 꺼져가는 조선의 국운을 되살려 낸 것처럼 잘못 조명되어 왔다. 이러한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살펴볼 것이다.
참고 자료
※ 참고문헌
- 단행본
국립진주박물관, 『임진왜란』, 국립진주박물관, 1997.
양재숙, 『임진왜란은 우리가 이긴 전쟁이었다』, 가람기획, 2001.
유성룡 저/이재호 역, 『징비록』, 역사의아침, 2007.
장학근, 『조선시대 군사전략』,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6.
장학근,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플래닛미디어, 2008.
조중화, 『다시쓰는 임진왜란사』, 학민사, 1996.
- 논문
강성문, 「임진왜란 초기육전과 방어전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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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숙, 「조선이 이긴 전쟁 Ⅱ」『역사와 사회』, 국제문화학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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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www.ency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