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3.1운동의 정치적 성격과 한계
- 최초 등록일
- 2008.05.29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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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 식민지 지배하의 한국에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범민족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의 정치적 성격과 그 한계점에 대하여 분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길 바랍니다.
목차
1. 3.1 운동의 배경
2. 3.1운동의 전개
3. 한계
4. 결과
[참고문헌]
본문내용
1. 3.1 운동의 배경
배경에서 먼저 강점기인1910년대는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 시기였다. 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10년의 합일합방으로 한국을 완전 강점한 일제는 무력을 증파하여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였고, 각종 식민지 악법을 공포하여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식민지 수탈에 혈안이 되었다. 일제는, 1883년 이른바 공사관 수비대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에 무력을 파견한 이래 침략의 진전에 따라 3.1운동 직전까지 군대를 증파하였고 경찰도 증파했다. 이러한 무력배치와 함께 일제는 각종 식민지 악법을 제정, 공포하여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하여 나갔다. 강점과 더불어 회사령(1910), 어업령(1911), 삼림령(1911), 조선교육령(1911), 광업령(1915), 개정 사립학교규칙 등 식민지 악법을 잇달아 공포하여 민족사업의 육성을 차단하고 식민지 수탈을 합법화하였으며, 민족문화와 교육을 억압하는 등 한민족 말살을 획책하였다. 일제는 1910년 8월 25일「집회 취체에 관한 것」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독립운동사강의」. p91~92
을 공포하여 모든 한인들의 정치결사와 집회를 금지시키고, 이 해 9월 대한협회 등 계몽운동 단체까지 강제로 해산을 명하였다. 1910년부터 1918까지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은 일제의 식민정책, 특히 토지점탈 및 조세수탈정책과 직접 관련된 것이었다. 이 사업의 결과 조선 총독부는 전 국토의 50.4%를 무상 약탈함으로써 최대의 지주가 되었고 소작 농민들의 지위는 매우 불안정해졌다. 또한 독립열사와 의병들을 고문, 살해했다.
당시의 국제적 정세는 1911년의 신해혁명과 1914년의 제 1차 세계대전,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등으로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이 일어나 전통질서를 부정하게 되었고 이러한 영향은 우리 민족에게도 전제 군주론을 크게 후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공화주의 혁명사상의 성장기반을 이루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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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혁명약사 : 3.1운동 이것이 궁금하다」 김행식. (서울 : 우삼, 2000)
- 「강점기 조선의 정치질서 : 忍從과 저항의 단층 변동」 박종성 (서울 : 인간사랑 1997)
- 「朴憲永論 : 한 조선 혁명가의 좌절과 꿈」 박종성 (서울 : 인간사랑 1992)
- 「한국 독립 운동사」 한국 근대사 연구회 (서울 : 한울 아카데미, 1998)
- 「이야기 독립 운동사 : 지금도 그 함성이」 이현희 (서울 : 청아, 1994)
-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운동의 사회사」 신용하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1)
- 동영상 자료 : 「재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http://www.jeam.go.kr ⇒ 시청각실
- 3.1운동 지도 http://blog.naver.com/ssoy115?Redirect=Log&logNo=70004570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