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1860년대 전 후의 조선왕조의 사회와 문호를 개방할 수 밖에 없었던 문제점들 당시의 안 밖의 상황들을 참고문헌을 토대로 직접 작성한 리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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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門戶開放과 開化思想
1860년대 전후의 朝鮮 王朝는 안팎으로 커다란 變化와 葛藤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년 간 계속된 世道 政治의 弊端으로 國家의 紀綱이 紊亂해졌으며, 地方 兩斑과 官吏들에 의해 수취 체제, 특히 삼정의 폐단으로 인해 民生이 破綻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朝鮮 후기 이후 經濟, 社會적 變化에 따라 성장하고 있던 農民 의식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農民 蜂起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1862년 진주에서 비롯된 壬戌 農民 봉기(壬戌農民蜂起)는 삼남(三南; 경상, 전라, 충청도) 각지에 삽시간에 波及되어 갔다. 이는 당시의 농민들이 朝鮮 王朝의 支配 體制와 이를 운영하는 兩斑 세력에 對抗하는 意味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農民 儀式을 대변하는 農民들이 추구하는 變化를 指向하며 傳統 信仰을 기반으로 現實 社會에 批判적인 農民들의 지지를 받은 東學은 朝鮮 王朝의 政治적, 社會적 支配體制를 正面으로 否認하고 나섰다.
이러한 狀況은 朝鮮 王朝의 基盤을 根本的으로 威脅하는 것이었다. 對外的으로는 植民地 確保를 目標로 하는 西洋 列强의 帝國主義적 侵略이 진행되는 시기로서, 日本이 1854년 美國에 의해 文豪가 開放되었으며, 中國은 1840년 阿片戰爭에서 英國에게 굴복한후에 1856년 애로 호 事件의 結果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屈伏하였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한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浸透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韓國의 연해에는 西洋 船舶들이 漂着하거나 接近하여와 한국인들의 두려움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1860년 英國, 프랑스 연합군의 北京 함락 소식은 동일한 문화권인 우리나라에도 西洋인들이 侵略할지도 모른다는 危機意識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안으로 전통 체제를 위협하는 농민들의 蜂起, 밖으로 植民地 侵略을 노리는 帝國主義 국가들의 접근은 국가의 自主權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대·內外로 위기에 당면한 당시 朝鮮 王朝로서는 이에 대처하는 정치 改革이 필수적인 시대 常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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