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경제적 발전과 신분변동
- 최초 등록일
- 2008.03.12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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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경제적 발전과 신분변동에 관한 자료입니다.
목차
경제적 발전
신분변동
<참고도서>
본문내용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17세기 이후 조선후기 사회는 중세 사회 해체기에 해당된다. 이전의 경제체제가 변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며, 조선 전기에 기반을 이루던 신분제가 이완되었다. 또한 정치구조는 비변사 체제로 전환되어 중앙 집권적 정치 구조를 심화시켰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조선후기 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신분변동에 관한 것이다.
경제적 발전
조선후기의 경제적 발전은 농업의 발달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농촌사회에서는 파괴된 농업 생산력의 회복과 증대를 위해 농지개간과 농법 개량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특히 농지개간은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며 장려하였는데, 이는 주로 지배층-사족들이 자본을 대고, 농민이 노동력을 대어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지주·전호제가 성립되는데, 이는 신분적 관계보다 경제적 관계가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경제적 발전의 측면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우선 부세제도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조세제도가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토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전세인 조의 체계가 변화되었고, 공물을 징수하는 공납제의 형태가 변화되어 갔으며, 인신의 역을 징수하는 역역의 체계도 변화되어 갔다. 그것은 각각 영정법·대동법·균역법의 형태로 체계화 되면서 전면적으로 재편되어갔다. 이는 토지 소유와 상품 화폐 경제 체제에 기반을 둔 부세 제도이다. 경제적 발달과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은 대동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토지 소유에 따라 미·포 등을 수취하는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하며 대동법이 경기도 지방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예전에 특산물을 호당 부담하여 양반호보다 평민호의 부담이 컸었다. 또한 방납의 폐단이 커 부담이 더해졌던 것이다. 대동법의 실시 결과, 방납의 폐단이 시정되고 공인 중심의 상품 유통관계가 발전하게 되었고 미곡의 상품화를 가져왔다.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민생정책인 동시에, 조선의 상품·화폐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또한 그 기준을 호(戶)에서 결(結)로 바꿔 징수함으로 과세 공평의 원칙에 부합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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