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강 위의 태양왕-루이14세-
- 최초 등록일
- 2008.01.03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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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루이 14세의 태양이라는 이미지에 숨겨진 그의 뒷 모습이라고 할 수있다. 단순한 역사적 외면에서 벗어나서 그 숨겨진 면모를 살펴 본 것으로 교수님으로 부터 새로운 주제로 평가받았던 리포트. 가격이 비싼 것은 그 만큼 애착이 있는 리포트로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짐. (장수가 제한 없었던 리포트에서 남들 20장 내서 A받을때 6장짜리로 A+받았던 것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왕실 시종이 된 귀족들.
3. 용변을 보는 왕을 보며 감탄하는 귀족들.
4. 극장왕국의 주연배우.
5. 맺음말.
본문내용
루이 14세는 155 ~ 160cm 정도의 키에 잘생긴 얼굴은 아니며, 35세쯤부터는 충치 때문에 윗니가 모두 빠져 플럼퍼(plumper, 이가 빠진 사람들이 볼을 통통하게 보이기 위해서 입에 물고 다니던 솜뭉치)를 입에 넣고 다녔다. 게다가 젊어서부터 머리까지 빠져 대머리였다. 하지만 그를 알현한 사람들은 그의 카리스마와 세련된 감각에 압도당하게 되었다. 무엇 때문일까? 그는 우선 작은 키를 가리기 위해 무척 높은(약 13cm) 붉은색 하이힐을 신었고,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최고 30cm나 되는 가발을 착용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작은 키를 보완하기 위해 신게된 하이힐이 그때부터 프랑스 남성 귀족들의 유행이 되었고, 곧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또한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착용한 가발이 프랑스 귀족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 귀족들에게도 모조리 가발을 착용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17세기 이후 등장하는 유럽 왕들이나 귀족들의 초상화에 하나같이 긴 가발들이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당시 영국에서는 청교도 ․ 명예혁명으로 절대왕정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경우도 루이 14세가 즉위하기 전에 프롱드의 난으로 위기를 경험하였다. 하지만 루이 14세에 이르러 다시금 태양왕이라 불리며 절대군주로써 유럽역사상 가장 많은 화재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661년에 즉위한 루이 14세는 전대미문의 통치스타일로 독특한 궁정문화를 창출했고, 그러한 궁정문화는 권력의 도구로 활용하여 귀족들을 통제하고 한 것이다.
특히, 루이 14세가 자신의 용변처리를 궁정 예식으로 정형화한 것은 당시로서도 새로운 일이었다. 15세기의 루이 11세만해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변기를 보지 못하도록 커튼으로 가려 놓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악취를 맡지 못하도록 쑥국화를 사들였고, 덕분에 그가 용변을 보고 난 뒤에는 커튼 뒤에서 쑥국화가 발견되곤 했다.
참고 자료
다니엘푸러/ 선우미정,『요강과 뒷간, 화장실의 작은역사』, 들녘, 2005
김상운,『세계를 뒤흔든 광기의 권력자들』, 자음과모음, 2005
김복래,『재미있는 파리역사 산책』, 북폴리오, 2004
콜린 존슨/ 방문숙,『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시공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