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 최초 등록일
- 2007.12.26
- 최종 저작일
- 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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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약용의 모든것.
목차
○정약용의 저서
◦1표2서
․흠흠신서
․목민심서
◦6경(六經 : 시경, 서경, 주역, 춘추, 예기, 악경)
◦4서(四書 :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문잡저(時文雜著)
○다산의 사상
◦자신의 인격수양으로 시작하는 학문
◦주자 성리학 비판, 공자 정신으로 돌아가자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학문
◦경세학,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사상
◦민(民)이 근본이다
◦기술을 개발하여 백성을 편하고 넉넉하게
◦사상
본문내용
○다산의 사상
◦자신의 인격수양으로 시작하는 학문
다산의 학문은 경학(經學)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자찬묘지명>에 “육경(六經)사서(四書)로써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을 갖추었다”고 적고 있다.
다산의 학문체계는 경학을 근본으로 하고, 경세학을 그 실현방법으로 보고 있다. 경학을 통해 수기(修己), 즉 자기의 인간됨의 완성을 위해 수양하고, 경세학으로 치인(治人), 즉 완성된 인격과 능력으로 천하와 국가를 경영(세상에 봉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배시절 초기에 경학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주자 성리학 비판, 공자 정신으로 돌아가자
다산은 『오학론』에서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의 다섯가지 학에 관해서 그 폐단을 비판했다. 다산은 당시의 지배적인 학문이던 주자성리학에 안주하지 않았다. 관념화된 주자성리학은 더 이상 시대를 이끌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공자와 맹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이는 결코 복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혁명적 사상은 당시의 지배이념에 대한 비판으로 그 근거를 고대의 전통에서 찾곤 했다. 다산의 개혁론도 전통에 내재된 본래적 가치를 재각성함으로써 현재의 묵은 폐단을 제거하는 논리를 취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다산정신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다산은 이론 위주의 성리철학으로 윤색된 육경(六經)과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공자, 맹자의 본지(本旨)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데에 힘썼다. 그 결과가 《논어고금주》48권을 비롯하여 《맹자요의》 9권 등 육경?사서에 대한 232권의 방대한 저술로 남았다.
여기서 다산은 성(性) · 인(仁) · 도(道) · 덕(德) · 명(命) 등 대부분의 유교의 중심적인 명제(命題)들을 다시 해석한다. 이(理)라는 관념의 세계로 해석한 주자와 달리, 실행과 실천이 가능한 실학적 사고로 새로운 경전 해석을 시도한 것이 다산의 경학이었다.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학문
다산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학문자세를 견지했다. 청나라에서 새롭게 전래된 경전해석 방법인 고증학이나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 등 새로운 사조에 열려있었다. 그리고 고증학의 실증적 태도 등 객관적 학문자세를 따르지만 그에 머물지 않았다. 실증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했다. 인간과 사회의 가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다산은 속유론(俗儒論)에서 ‘속된 선비는 시의(時宜)를 모르니 어찌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에 대해 논하면서, 고루한 선비의 잘못을 질타했다.
“참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며,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