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난 시 1차 진주성 대첩의 실상과 바른 민족사 교육 방안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7.12.21
- 최종 저작일
-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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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진주성 대첩에 대한 요약글과 바른 역사교육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이 수록되어있습니다.
현재 역사교육에 대한 장점, 단점, 해결방안 까지 함께 적었습니다.
목차
가. 서론
나. 1차 진주성 대첩의 배경과 실상
다. 원인 탐구를 통한 바른 민족사의 교육방안
1) 1차 진주성대첩의 원인 탐구
2) 승첩의 원인을 통해 본 바른 민족사 교육방안
<초등학교 역사 교육의 문제점>
1)아동의 흥미와 유리된 민족정체성의 수업
2)왜곡의 문제 - 교과서와 교사의 침묵
3)과거에서 유리된 역사수업
<해결방안과 그에 따른 효과>
1)아동의 흥미와 체험을 중시하는 역사교육이 되어야 한다.
2)진실에 대한 가감 없는 역사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3)역사교육에 대한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본문내용
임난 시 1차 진주성 대첩의 실상과
바른 민족사 교육 방안에 대하여
가. 서론
임진왜란 7년 중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권율장군의 행주산성대첩과 함께 김시민장군의 진주성 대첩을 일컬어 임란 3대첩이라 한다. 이 가운데 일본이 역사책에 『임란 때 진주에서만 대패했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일본이 대패한 전투가 바로 진주성 대첩으로, 3800여명의 소규모 군대로 2만여 명의 정예 왜군을 격퇴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 7년 전행 중 1차 진주성 전투는 임난 3대첩에 들어가는 큰 대첩이었다. 2차 진주성전투는 명․왜의 강화교섭에 우리 측이 참여하지 않는다 하여 명의 도움 없이 왜가 1차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대규모 보복전이 11일간 주야 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차 전투 때와는 달리 병기와 화력의 준비도 철저치 못하였지만, 군사 수에서도 1차 때보다 더 큰 차이가 난 중과부적의 대 접전이었다. 또 성이 함락된 뒤 수성군민이 당한 참상은 어떤 전투보다 참혹하였다. 1차 진주성대첩의 실상에 대해 알아보고, 그 국난을 극복했던 조상들의 지혜와 저항정신을 되새겨 바른 민족사 교육의 교훈을 찾아보는데 주안점을 두고 논지를 전개하겠다.
나. 1차 진주성 대첩의 배경과 실상
임진년 5월 하순에 초유사의 임무를 띠고 학봉 김성일이 진주에 도착하였을 때 진주 고을은 텅 빈 상태였다. 일본 수군이 남해안의 고성 등지를 유린하고 ‘진주를 점령하려 한다’는 선전을 하면서 사천쪽으로 서진하자, 우수사 원균이 노량으로 도망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놀란 진주 목사 이경과 판관 김시민이 지리산으로 피난을 갖기 때문이었다. 김성일이 진주 목사를 다시 불러내어 진주성을 지키게 하였으나, 목사 이경이 산중에서 병사하였으므로 김시민으로 하여금 목사를 대리하게
참고 자료
『역사비평, 통권58호』中,
1)「자신을 망각한 세계화란 있을 수 없다」, 김성호
2)「역사논쟁에 대한 사회학적 이해」, 박명규
3)「역사연구와 교육의 몇몇 고려들 -객관과 비교의 비판」, 박명림
4)「민족주의 사관과 발해사」, 송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