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고려 공민왕의 반원개혁
목차
Ⅰ. 서 론
Ⅱ. 공민왕의 즉위과정
Ⅲ. 공민왕의 왕권강화와 반원 정책
1)공민왕 원년 개혁
2)5년 개혁의 개혁
3)12년 개혁의 개혁
4)20년 개혁의 개혁
Ⅳ.맺음말
본문내용
恭愍王은 일찍이 忠惠王 後 2년(1341) 5월 , 12세 때 王弟로서 원 順帝의 명을 받아 入元 즉위하게 되었는데 공민왕의 즉위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였다.
이익주,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역사와 현실》15,한국 역사연구회,(1995)
, 大元子라 불리면서 다음의 고려 왕위 계승 후보자로 지목받았지만, 忠惠王이 돌아간 다음에는 忠穆王이 즉위하고, 忠穆王 다음에는 치열한 경쟁 끝에 忠定王에게 패배함으로써 귀국의 기회를 잃고 그대로 원에 머물면서 숙위를 계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공민왕은 魏王 딸 魯國公主와 혼인함으로써 《고려사 절요 》권제 26,충정왕 ,원년, 10월.
원의 駙馬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고 부원세력인 盧預과 崔濡 등에게 접근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즉위과정에서 趙日新과 같은 친원 세력을 자신의 주위로 끌어들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원은 忠定王 3년 (1351) 10월에 忠定王의 퇴위 《고려사 》세가37, 공민왕 ,원년,3월 ,신해일. 공민왕 즉위 후 충정왕은 강화로 쫓겨나고 결국 공민왕 원년 3월에 독살되었다.
와 忠愍王의 즉위를 명하여 恭愍王이 고려의 왕으로 즉위하였던 것이다. 공민왕의 추대 세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공민왕의 즉위에 큰 힘이 되어준 세력 중의 첫 번째가 기씨 세력이라 할 수 있다. 기씨 세력은 원의 외척이 되면서 고려에서 큰 친원세력으로 자리 잡았는데, 이는 충목왕대의 奇三萬의 獄死事件으로 整治都監이 와해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충정왕 즉위 때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기씨 세력이 공민왕 때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공민왕의 왕위추대활동을 하였다. 즉 ,공민왕의 즉위를 알리고 충정왕으로부터 國璽를 거두면서 江로 퇴위시켜 보내도록 한 원의 使臣 完者不花는 곧 기철의 조카인 奇完者不花였던 것이다. 기씨 일족은 공민왕의 즉위를 강행시키는 원의 조치에 使臣으로서 참여했던 것이다.
참고 자료
ㆍ홍영의 외 『실패한 개혁의 역사』 역사비평사, 1998년 2쇄ㆍ이정신외 『고려시대 사람들 이야기-정치생활』ㆍ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 어떻게 살았을까-정치경제생활이야기』청년사ㆍ김창현외 『고려500년 의문과 진실』 김영사ㆍ민현구,「高麗 恭愍王의 反元的 改革政治에 對한 一考察 - 背景과 發端 -」,『震 檀學報』68, 1989.ㆍ주석환,「辛旽의 執權과 失脚」.『史叢』30, 고려대학교 사학회,
ㆍ이창형 「恭愍王代 武將勢力에 대한 考察」, 전북대학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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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변은숙, 「고려 후기 정치개혁에 대한 연구」, 명지대학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