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삼리삼별
- 최초 등록일
- 2007.12.07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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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두보의 `삼리삼별` 시의 원문과 해설을 수록했습니다.
목차
杜甫의 三吏三別
1. 두보의 생애와 시풍
2. 三吏三別 해석
1) 석호리(石壕吏)
2) 신안리(新安吏)
3) 동관리(潼關吏)
4) 무가별(無家別)
5) 신혼별(新婚別)
6) 수로별(垂老別)
3. 三吏三別의 시대적 의의
본문내용
杜甫의 三吏三別
1. 두보의 생애와 시풍
杜甫(712~770)는 자가 子美, 호북성 양양현 사람으로 초당시인 두심언이 조부이다. 두보는 그 부친대에 가세가 기울어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병이 많았다. 그러나 학문을 좋아하여 7살에 시를 지을 정도였다. 20대 전후반에 각각 옛날 吳, 越과 齊,趙의 땅을 유람하고 장안에서 이백, 高適등과 내왕하며 청년시기를 기개와 포부를 보여주는<망옥><방국조호마>등의 작품을 짓는다. 24세에 과거를 보았지만 이림보의 방해로 급제하지 못하다 33세 무렵에 현종에게 자신을 알리는 글을 올려 이로부터 4년 뒤 낮은 관직을 얻었으나 여전히 궁핍한 생활을 한다. 이때 섬서성에 있던 그의 어린 아들도 굶어 죽는다. 10여 년을 장안에 머무르며 곤궁한 생활 속에 조정의 부패와 백성들의 고통을 목도한 두보는 "귀족들 집에는 술과 고기 썩어 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사람 뼈 나뒹군다( 주문주육비, 로유동사골" 같은 사실주의적인 사회시를 쓰기 시작한다. 곧이어 일어난 안록산의 난을 계기로 두보의 생활은 커다란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안록산의 난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두보는 장안에 억류되었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있던 봉상으로 갔다. 숙종은 장안을 탈출하여 전란 중에 봉상까지 달려온 그의 충성심을 높이 여기고 왕실의 측근의 간관인 좌습유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에 찬 시기는 얼마 가지 않아 무모하게 숙종에게 직언을 했다가 노여움을 산 두보는 섬서성 화주의 하급 관리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는 정치와 관직생활의 덧없음을 한탄하며 다시 이전의 하급 지방관 생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의 시 또한 다시 이전의 비판적인 경향으로 되돌아갔다. 이 시기에 그는 화주로 부임하는 도중에 목격한 비참한 서민들의 생활상과 가혹한 시대 상황을 노래한 <石壕吏>,<新安吏>,<潼關吏>,<無家別>,<新婚別>,<垂老別>의 <三吏三別>이라 불리는 유명한 여섯 수의 작품을 남겼다. 장안에서 왕유, 잠삼과 어울리며 잠시 안정된 생활을 하던 두보는 다시 화주의 사공으로 좌천되는데 가뭄으로 가족도 먹여 살릴 수 없어진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태주, 동곡을 거쳐 성도에 정착한다. 성도에서는 절도사 엄무의 추천으로 그의 참고격인 검교공부원외랑을 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한다. 이 시기에 쓴 시가 <태주잡시>,<문관군수하남하북>이다. 엄무가 죽은 후(두보 54세)관직과 생활 근거를 잃은 그는 가족을 끌고 성도를 떠나 호남, 호북 일대를 전전하다 57세 되던 해에 양자강의 지류인 湘江의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는 열흘을 굶다가 갑자기 음식을 많이 먹고 급사했다고 한다. 유명한 회고시<秋興>은 이때의 작품이다.
참고 자료
당시읽기. 요시까와 코오지로오.미요시타쯔지지음/심경호 옮김. 창작과 비평사
당시. 김원중 역해. 을유문화사
당시의 자미. 변성규 역주. 교학 연구사
중국고전문학의 전통. 한국방송통신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