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대일외교
- 최초 등록일
- 2007.12.06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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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별초의 대일외교는 어떠했는지 알아본다.
몽고침략부터 우리의 대응과 삼별초의 천도과정 등 상세히 기술했다.
고려첩장불심조조를 분석했다.
목차
○ 들어가기 전에 - 몽고의 고려침입과 전개 요약
○ 삼별초의 진도 입거
○ 진도를 선택한 삼별초 - 삼별초가 진도를 선택한 이유 (지리적, 방어적 조건)
○ 진도에서의 삼별초의 활동과 민심의 호응
○ 삼별초의 대일 외교문서 (고려첩장불심조조)
○ 삼별초 대일 외교의 성격
본문내용
○ 들어가기 전에 - 몽고의 고려침입과 전개 요약
몽고는 세계정복을 위해 동쪽으로 여진 남쪽으로는 남송을 정복하고 고려를 밟고 일본정벌을 하려는 동방전략을 실시 → 몽고는 고종 12년(1225)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유역에서 피살당한 것을 구실로 삼아 1231년 고려를 침략 → 1232년 최우 대몽항전을 위해 강화 遷都 → 몽고 강화도 정부에 親朝와 出陸還都(개경환도)를 요구 → 고종과 당시 집권자인 최우 이를 거부, 海島立保策을 고수 → 몽고 고려의 각처를 초토화하여 강도정부를 압박. (약 30여년 6차례) → 1249년 집권자 최우(대몽강경파) 사망 → 고려조정 내에서 몽고에 대해 변화의 기미(출륙환도 후 몽고와의 主和)가 보이나 최우의 아들 최항은 계속해서 대몽항쟁 일관 → 1257년 최항 사망. 최항 사망 후 주화파 득세, 몽고 친조보다 낮은 태자입조 요구 → 1259년 4월 말 태자입조, 6월 고종 사망, 7월 몽고 헌종(몽케)사망 → 쿠빌라이 황위계승, 태자(원종) 왕위계승 → 원종 왕정복귀위해 당시 집권자 김준을 휘하 임연 주살 명령 → 임연 병권장악 후 원종과 대립, 폐위 → 몽고 원종의 폐위 거부, 복위요청 → 원종 친조 후 임연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요청 → 임연 사망, 아들 교정별감 임유무 제거 → 1270년 원종 개경환도 선언 → 항몽파 무신들 반발, 6월 1일 배중손이 노영희 등과 반란
○ 삼별초의 진도 입거
배중손과 지유 노영희 등(이하 아이들)이 봉기하자 강화도는 1231년 천도할 때 보다 혼란하였다. 배중손과 아이들은 삼별초를 거느리고 저자에 모여 관부(관청)를 설치하고 관원(공무원)을 모집하고 좌우승선등의 관직을 임명하였으며 승화후 온을 짱으로 추대하였다.
→ 1270년 고려에는 한 나라 안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게 됨
삼별초정부(진도정부) vs 고려정부(개경정부) → 몽고와 원종에 굴복하지 않겠다!!!!!
승화후 온은 원종과 6촌 즉, 왕족 → 봉기의 명분과 삼별초가 (고려)정통성을 이은 거야!!
삼별초 정부는 성격상(대몽항쟁) 무신정권(대몽항쟁으로 일관)을 계승한 것이다.
참고 자료
KBS,「삼별초, 진도에 또 다른 고려가 있었다.」『역사스페셜』, 1999.
KBS,「36편 강화 천도, 작전인가? 도피인가?」『HD 역사스페셜』, 2006.
윤용혁,『한국사』 20,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1994.
유영철,「고려첩장불심조조의 재검토」『한국중세사연구』창간호, 한국중세사연구회 1994.
김당택 외,『한국사』18, 고려무신정권, 국사편찬위원회, 1993.
한일관계사학회,「한일관계 2천년 보이는 역사, 보이지 않는 역사」경인문화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