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목 구조
- 최초 등록일
- 2007.12.05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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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목구조에 관한 레포트 입니다.
현장 답사도 했구요 각종 문헌들을 참고해서 알차게 쓴 레포트 입니다.
목차
◈ 머리말
1. 목구조의 정의
2. 목구조의 기원
3. 목구조의 종류
3.1 민도리집 구조
3.2 포집구조
4. 목구조의 구조
4.1 기둥-보 구조
4.2 중 목구조 방식
4.3 경골공법
4.4 통나무 조립공법
5. 목구조의 재료
5.1 침 엽 수
5.2 활 엽 수
6. 목구조의 용도
6.1 주택건축
6.2 궁궐건축
6.2.1 고구려의 궁궐 건축
6.2.2 신라의 궁궐
6.2.3 발해의 궁궐
6.2.4 고려의 궁궐
6.2.5 조선의 궁궐
6.3 학교
6.4 사찰건축
6.5 종묘건축
7. 목구조의 장단점
7.1 목구조의 장점
7.2 목구조의 단점
8. 목구조의 시공 순서
9. 목구조의 시공사례 연구
10. 결론
본문내용
◈ 머리말
우리 한국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를 중심으로 살아오면서 무수한 건축물들을 지어 왔다. 한국인에 의하여 이 땅 위에 지어진 이들 건축들이 바로 한국건축인 것이다. 이들 건축들은 목조건축으로부터 석조건축, 전축건축, 철근 콘크리트조건축, 철골조건축 등 여러 가지의 건축자재들과 구조방식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여러 가지 건축 중에서 가장 주류를 이루며, 나아가 가장 한국적이며 전통적인 건축을 대표하는 것은 목조건축이다. 다시 말해 목조건축이 바로 한국 전통건축의 주인공인 것이다.
1. 목구조의 정의
목구조는 건물의 골조를 목재로 조립한 가구식 구조체이다. 건축물의 기둥과 도리 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 보 등의 부재들을 이음과 맞춤에 의하여 짜 맞추어 제작되고 모든 구조재들은 목재 다듬기를 통해 만들어 진다.
2. 목구조의 기원
우리나라 건축은 고대로부터 중국대륙의 영향권 안에서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순수한 중국식 건축의 모방이 아니었으며 단지 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되고 그 안에서 한국화 되었다. 중국의 건축기법이 우리나라에 미친 최초의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낙랑군이 북한 땅에 들어서던 시기부터 본격적인 한나라의 문물이 직접 들어온 것 같다. (당시의 토성이나 그 안에 있었던 건물터에서 한 대양식의 와당(막새기와 처마 끝에 놓는 수막새와 암막새
)출토)
그 후 낙랑군을 멸망시킨 고구려는 지형상 중국과 가장 밀접하여 백제나 신라다 한걸음 앞서 중국의 문물을 받아 들였고 건축 활동도 활발하였으며 건축기법도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현존하는 그들의 고분, 벽화를 통해서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며 고분벽화에서 밝혀진 일반적인 건축술은 목조가 주된 형식이다.
우리나라에는 현존하는 그 당시의 유구가 남아 있지 않으나 같은 시기의 일본건축을 보면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석굴세부에 나타난 요소와 공통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법융사를 보면 세부수법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수법과 공통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이미 토착화 되었던 건축양식이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입증하여 주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 그와 같은 건축물이 엄연히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특히 4세기 후반에 들어온 불교의 영향은 우리나라 건축에 현저한 변화와 발달을 촉진시켰다. 삼국 중에 제일 먼저 불교가 전래된 고구려는 왕권의 확립 과정에서 불교가 지주의 역할을 하였다. 백제나 신라에서도 고구려보다는 뒤늦게 불교를 받아 들였지만 고구려에 못지않게 국가형성 과정에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으며 널리 보급되고 신봉되었다.
당시 삼국의 사찰배치 형식은 중국 육조에서 시작되었던 일탑일당의 남북일직선의 축으로 된 배사의 배치도 남으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남북 일직선상에 놓이고 중문에서 강당까지를 장방형의 회랑으로 둘러막았다. (그림 1)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일본의 사천왕사에도 보이며, 그 근원은 백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중엽 이후, 우리나라는 당의 문화를 흡수하여 불교예술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특히 경덕 대왕에 이르러서는 각종 예술분야가 가장 원숙하였던 황금기로 건축 활동도 외는 아니었다. 이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국력이 팽대하고 태평성대를 누렸던 배경의 저력과 삼국의 기예가 총화를 이루어 한국화 된 미적 감각을 실현화 시켰던 까닭에 있었다고 보인다. 건축에서도 기법이나 조형의식, 실용수학의 응용 등이 최고조에 달하였음은 현존 유적지의 정리된 기단, 정연한 초석들, 세련된 왕당의 조각수법 등에서 찬란하였던 건축의 면모를 상상할 수 있다. 8세기 중엽에 중창된 불국사만 보더라도 평지사찰과는 달리 산록을 효과 있게 이용하여 자연지세와 인공사역을 조화시키려는 전통적 한국건축의 근본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림 2)
고려왕조에 들어와서도 초기나 중기까지는 목조건축의 양식이 크게 변화되지 않고 통일신라 양식이 그대로 전승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때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진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해서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황주 성불사 응진전 등 약 10여동이 고려시대 건물로 현존하고 있다. 이들 건물 중에서 최고의 양식이라 생각되는 건물이 통일신라시대의 수법이라 할 수 있는 봉정사 극락전이다. (그림3 참조)
참고 자료
최준오, 임병훈, “건축재료학”, 도서출판 서우, 2002.03.15
권오현, 신장호, “건축구조학”, 보문당, 1998.02.25
김동현,“한국 목조건축의 기법” 발언, 1995.06.20
주남철, “한국의 목조건축”,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