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서역 문화교류사
- 최초 등록일
- 2007.11.26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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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주에 있는 아랍 유물 유적을 바탕으로 신라와 서역간의 교류가 있었는지를
규명해보는 자료입니다.
목차
1.처용암
-설화속의 처용
-역사속의 처용
2.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상
-문인상이 신라인인 이유
-무인상의 형상 묘사
-신라 무인상의 모델이 서역인인 이유
-신라에 아랍인들이 있었다는 견해
-그 반대 견해
3.장식보검
-장식보검 개요
-전래설
-제작설
4.고대아랍문헌 속 신라
-신라 지명에 대한 논쟁
-신라의 지리적 개념에 대한 논쟁
본문내용
신라 무인상의 모델이 서역인인 이유
중국 당나라 호인용의 영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음.
당시 당나라에서는 서역 무장들을 모델로 하여 무사상의 호인용을 만들어 능묘의 명기로 사용하고 있었음.
당의 호인용과 신라의 무인상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점은 이들간의 연관성을 말해줌.
서당문물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던 신라 귀족계급들이 서역인 용상을 채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움.
이 무인석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임
신라에 아랍인이 있었다는 견해
신라의 무인상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확대 발전.
또한 무인상 얼굴의 형상이나 옷은 서역인의 특색 그대로며 그 선명성과 정확성은 놀라울 정도.
그것은 서역인에 대한 직관이나 현장모델 없이는 불가능했음을 말함.
이는 8~9세기 경에 이미 아랍 무슬림들이 신라 현지에 나타났고, 그를 현장 모델로 채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과 일치.
괘릉 무인상 오른쪽 옆구리에 있는 복주머니는 한민족 고유의 장신구로서 이는 서역인의 내왕이나 정착에 바탕을 둔 두 문화의 융합된 결과.
그 반대 의견
당시 신라는 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미 전부터 당 유학이 성행.
여러 계층과 직업의 사람들이 당에 유학.
당시 당의 양주,강주에서는 서역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음.
당으로부터 들어온 그림 속 서역인들을 모델로도 무인상을 조각할 수 있음.
괘릉 무인상 오른쪽 옆구리의 주머니는 복주머니가 아니라, 산낭으로 장안에 거주하던 서역 상인들이 주판 등을 넣어 다니던 것에서 유래.
참고 자료
<신라,서역교류사>, 무함마드깐수, 단국대학교출판부, 1992
<신라인의 실크로드>, 신형식 외8인, 백산자료원, 2002
<삼국사기>, 김부식 저, 구인환 역, 신원문화사, 2003
<삼국유사>, 김원중 역, 을유문화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