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 - 로마 공화정의 대두 (기원전 509~287)
- 최초 등록일
- 2007.11.26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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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고대사 과제로 낸 레포트 입니다.
로마사에서 특히 공화정의 대두에 관해 상세히 서술했습니다.
목차
초기 공화정 역사에 관한 자료
신전 봉헌.
리누스의 파스티(Capitolini Fasti).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콘술직의 발달.
원로원.
켄투리아 회.
상층 시민의 우위.
사제직과 사제단.
로마법에 규정된 사제의 역할.
신분투쟁.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
사회 정의를 쟁취하기 위한 평민들의 투쟁.
10인 위원회 이후의 발전- 트리부스 인민 회(the Comitia Tributa).
정무관 직의 발달 - 켄소르(censor).
잠시 제동이 걸린 평민들의 상승
신흥 귀족의 등장과 정무관 직에 발생한 추후의 변화.
로마 국제의 실체들.
본문내용
로마 공화정의 국제는 몇 가지 이론적 원칙들을 가지고 단번에 완성되어 단일 문건에 고이 안치된 게 아니었다. 공화정은 강력한 과두 정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디그니타스와 아욱토리타스 같은 단어들을 중시 한 데서 드러나듯이 지위와 신망을 지나치게 의식했다. 현대와 같은 평등주의 사상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로원의 토론은 콘술들의 선에서 결론의 윤곽이 잡히고, 앞의 발언자들이 제시한 노선을 따라 결론이 내려지곤 한 게 분명하다. 이유는 서열이 낮은 사람들은 대부분 전임 콘술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정무관 직에 선출되었고, 더 높은 정무관 직에 오르기 위해서 그들의 지속적인 후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시민들의 보호자들로 출발한 호민관들조차 사실상 이 과두세력에 의해 선출이 좌우되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민회들은 원로원의 토지 귀족들과 콘술 귀족들의 이익에 의해 좌우되었다. 물론 쿠리아 회는 공화정 시대 내내 과거의 형식적인 잔재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 민회에 굳이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었다. 켄투리아 회, 트리부스 회, 평민회는 달랐다. 이 민회들은 정무관들을 선출하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배타적 권한을 갖고 있었고, 중요한 법률적 기능들도 갖고 있었다.
신분 투쟁은 2백년간 강도를 달리하여 지속되었다. 그 기간에 공화정은 법과 제도와 관행을 발전시켰다. 그동안 평민들은 빚 때문에 노예가 될 위험이 사라졌고, 정무관들의 독단적 권력 사용으로부터 보호를 받았고, 법 체제가 좀 더 개방 되었고, 토지가 없던 사람들이 토지를 얻으려고 한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은 부유한 평민 지주들이었다. 로마인은 자신들의 적당한 필요가 채워지면 자기보다 재산과 권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배를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권력자들에게 학대를 당하지 않는 것이었고, 만약 당한다면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약속하는 귀족 보호자를 기대했다.
참고 자료
로마사 - 프리츠 하이켈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