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 최초 등록일
- 2007.11.22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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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말 열씸히 쓴 레포트입니다,
A+받은 자료입니다,
목차
병자호란이란
병자호란이 일어날 당시, 대외적 배경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영향,, 정묘호란
병자호란 피란 당시,,
병자호란 이후,,,
본문내용
병자호란이란 우리나라 조선의 임금,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한 사건으로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불리며 우리나라가 조선시대 최초로 항복했던 전쟁이었다. 이러한 치욕적 사건에 대해 우리들은 한 집단으로서 그 결과만을 따져 이 사건을 비관적으로만 보는 견해들이 대다수라고 본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어두웠던 역사의 뒤안길에서 쓰여진 이야기이지만 우리 민족이라면 한 번 쯤은 반드시 읽고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 원인, 결과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 볼만하다고 생각하여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날 당시, 대외적 배경 ↓누르하치
여진주 땅의 오랑캐 누르하치는 명나라 조정의 대장이 된 후로 세력이 강성해져서 중국 무순성을 함락시키는 등 세력을 떨쳤고, 조선국 원병과의 싸움에서도 크게 이겼다. 이때 누르하치는 우리나라를 통치코자 포로 강홍립을 억류 시켰다. 국호를 ‘금’이라 하고 황제의 옷을 입고 ‘짐’이라 칭하였다. 누르하치는 1626년 광령에서 원숭환에게 패한 분통으로 죽자, 차자 홍타이지가 대를 이었다. 갑자년 이괄의 난 때 한명력의 아들이 오랑캐의 땅으로 도망하여 조정에서 강홍립의 일문을 다 죽였다고 거짓을 고하였다. 그 바람에 강홍립이 홍타이지를 꾀어 1627년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다. 조정에서는 강홍립에게 그 삼촌과 처자를 보이고 화친하기를 청하여 금과 조선은 백마의 피를 마셔며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그 후로 오랑캐에게 봄 가을로 사신을 보내곤 하였다. 병자년 봄에 홍타이지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청이라 했다. 같은 해에 용골대, 마부대가 인열왕후 국상의 조제를 핑계로 우리나라를 탐지하러 왔는데, 조정에서는 이미 화친을 배척하여 사신을 박대했으며 오랑캐 왕자가 보낸 편지에 답도 하지 않았다. 주상이 화친을 파한다는 말씀이 있은 후에는 오랑캐를 치자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러나 김류,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하여 홍타이지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홍타이지가 대신과 왕자를 11월 25일 안으로 보내지 않으면 진격하겠다는 답서를 보내왔다. 묘당이 이를 보고 대신을 보내고자 했으나, 척화파 ↑홍타이지 의 반대로 보내지 못하다가 뒤늦게야 보냈으나 홍타이지가 믿지 않았다. 섣달 초 6일에 봉화가 올랐으나, 도적이 온다는 것인 줄 모르고 있다가 초 9일에 비로서 알게 되어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그 장계를 도중에 적에게 빼앗겨 조정에서는 모르고 있었다.
참고 자료
산성일기 -인조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