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_5~6세기 중국과의 관계와 고구려의 천하관
- 최초 등록일
- 2007.10.23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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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가 동아시아 패자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은 그에 합당한 이유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목차
서론
본론
ⅰ. 북연北燕의 멸망과정에서 나타난 고구려의 대외관계
ⅱ. 북위와의 관계
ⅲ. 남조南朝 및 유연柔然등 국가와의 관계
ⅳ. 5~6세기 국제 관계 성격의 규명
ⅴ. 고구려의 천하관
결론
본문내용
글 일부...결론
5세기의 동아시아는 국제관계가 세력균형과 자소사대를 공존한 질서를 보이고 있다. 중국 왕조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동아시아의 차원에서 볼 때, 일국 중심의 세계 질서인 자소사대 체제를 상정한 조공.책봉 관계의 외투가 부분적으로 덮인 가운데 실제적으로 세력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시기 동아시아 제국간에 형성된 상하 관계는 그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다원적이었다. 고구려는 남.북조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한편으로 신라와 조공 관계를 이루었으며 북위에 한 차례 조공을 하기도 했던 부여를 예속국으로 두고 있었고, 일부 거란 및 말갈 집단을 휘하에 종속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유연과 함께 지두우의 분할을 도모하고, 실위에 철을 공급하면서 내몽고 동북부 지역에 세력을 뻗쳤다. 이 시기 평양은 동북아 지역 소국제적치권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굳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지배하기보다는 동방지역에서 고구려의 문화를 지키면서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즉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구별되는 천하로 진출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갈 때, 고구려는 농경지대의 중심인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고구려 중심의 세계를 형성한 것이다.
참고 자료
고구려의 발견, 김용만지음, 바다출판사, 1999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지음, 사계절, 1999
고구려본기, 박영규지음, 웅진출판, 1997
우리 고구려 찾아가기, 오순제지음, 다시, 2004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김용만지음, 창해,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