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고구려는 수의 통일로 인해 국가적 위기에 봉착한다.
전쟁 전의 상황, 그리고 전쟁... 당시의 전쟁장비와 전술까지,
"수당전쟁"이라는 말로 간과하는 `고구려와 수의 전쟁`에 대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알아보도록 한다.
목차
서론
ⅰ. 세계 역사상 최대의 문명전쟁
ⅱ. 국제정세의 변화
ⅲ. 문명전쟁의 원인
본론
ⅰ. 1차 전쟁
ⅱ. 2차 전쟁
ⅲ. 3차 전쟁
ⅳ. 4차 전쟁
ⅴ. 고구려의 대수전쟁 전략
ⅵ. 전쟁 장비
ⅶ. 수나라의 전술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ⅰ. 세계 역사상 최대의 문명전쟁
중국 내륙 서북부 서안西安에 도읍한 수․당이 만주 지역에 있는 고구려와 제국의운명을 건 혈투를 벌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 2차 전쟁에서 수 양제는 대외적으로 200만 대군이라고 칭했는데 200만이면 전 중국 인구의 5~7.7%에 해당한다. 고구려가 망할 때 호구가 69만 호라고 했다. 1호가 몇 명의 인구를 포함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00만 호라고 하고 1호마다 남자가 5명씩 있다고 해도 전 남성인구는 500만, 80만호로 잡고 1호당 남자 가 3명씩이라고 하면 240만이다. 현재 우리나라 군병력은 60만이다. 이 숫자는 인구비례를 무시하고 순 병력수만 갖고 따져도 세계 5위 안에 든다. 그런데 60만은 1970년대 인구가 3천만일 때를 기준해도 전 인구의 2%에 불과하다. 그러니 전 인구의 5%를 원정에 동원했다면 중국 국내의 군사력은 텅 비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대전쟁을 어떻게 치를 수 있었을까? 이는 중원의 패자 수․당과 북방의 패자 고구려 사이의 천하관의 충돌이었다. 중원에 들어선 통일왕조는 동아시아 전체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고, 고구려 역시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시조 추모왕을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딸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조선상고사』에서 “지나支那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 하면, 반드시 피차 내부의 분열과 불안이 있어 각기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일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를 간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고구려와 수나라의 4차례에 걸친 전쟁을 알아보도록 한다. 전쟁 전 상황 및 당시의 전쟁 장비도 알아보도록 한다.
ⅱ. 국제정세의 변화
5세기와 6세기에 걸쳐 고구려문명권과 북방 유목문화권, 그리고 남북조로 나누어져 있던 중화문명권이 4~5개 국가에 의해 주도되던 국제질서는 6세기 말에 들어와 큰 변화를 겪는다.
참고 자료
전쟁과 역사, 임용한 지음, 혜안, 2001
살아있는 한국사, 이덕일 지음, 2003
한국사 5 -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 고구려, 국사편찬위원회, 1996
우리 고구려 찾아가기, 오순제 지음, 다시, 2004
고구려의 발견, 김용만 지음, 바다출판사, 1999
고구려 제국사, 서병국 지음, 혜일, 1997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이덕일 지음, 한국방송PD연합회기획,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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