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목차
Ⅰ. 한국영화산업의 흐름
Ⅱ. 한국영화산업의 현황
Ⅲ. 한국영화산업의 성장요인
Ⅳ. 한국영화산업의 구조
Ⅴ. 한국영화산업의 문제점
VI. 한국영화산업의 발전방향
본문내용
I. 한국영화산업의 흐름
1. 초창기(영화비지니스의 태동기) : 60년대 이전
(1) 역세권, 즉 사람이 모이는 곳(시장)에 극장이 건립되고 영세한 규모로 운영되었다.
영화는 1987년부터 1903년 사이에 한국에 도래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서양의 선교사와 일본인 상인들에 의해 소개된 영화에 대해 충격과 경이로움으로 환호하였다. 신문 자료 에 의하면 한국에 최초 공개된 활동사진은 1903년 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 되었다. 프랑스와 미국 등 서구에서 영화가 오락으로 대중과 호흡하였듯이 한국에서도 대중문화에 편입되어 오락으로 수용되었다. 관객의 호응은 높았지만 당시 한국 영화계는 자본의 부재와 제작 장비 및 기술의 미비라는 열악함을 면치 못하였다.
한국영화사에서 최초의 한국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상영된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를 정설로 삼고 있다. 이 영화는 일본 신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연쇄극이라는 장르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에서 저축 장려목적으로 만든 계몽영화인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1923)를 한국영화의 시초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또 한편 1923년 1월 11일 상영되었다는 신문 기록이 남아있는 일본인 원산만 감독의 <국경>을 한국 영화의 효시로 삼자는 주장도 존재한다. 효시로 거론된 세 편의 작품은 모두 연쇄극 <의리적 구토>, 계몽영화 <월하의 맹서>, 일본인 감독 <국경>이라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해방 전 한국영화사는 나운규가 중심에 존재했다. 춘사 나운규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은 영화작가는 드물었으며, 1902년 함경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1924년 <운영전>에 단역 배우로 출현하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1926년 <아리랑>을 감독하였으며, <아리랑>은 네가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다만 나운규의 회고나 출연배우의 회고담을 통해 그 실체 확인과 평가 작업이 이루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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