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7.09.05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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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한 고찰
목차
Ⅰ.머리말
Ⅱ.百濟의 遼西進出에 關한 記事 檢討
1.中國側 史書에 나오는 ‘百濟遼西略有’의 關聯記事
2.北魏와의 戰爭을 기록한 記事
Ⅲ.遼西 百濟郡의 位置
Ⅳ.遼西進出의 時機
-百濟郡의 成立과 消滅
Ⅴ.百濟의 遼西進出의 背景
Ⅵ.百濟의 對外政策과 海外交流
1.高句麗와의 對外關係 2.新羅와의 對外關係
3.中國과의 對外關係 4.倭와의 對外關係
Ⅶ.맺음말
『參考文獻』
본문내용
Ⅰ.머리말
한국고대사 연구가 다방면에서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잡기 힘든 난제가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난제는 고대사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대체로 사료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데 百濟의 遼西進出設도 마찬가지이다. 백제가 요서지역에 진출하였다는 사료는 한국 측 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중국 측 사서에만 나온다. 이는 김부식을 비롯한 『三國史記』편자들은 백제의 대륙영토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중국 사서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대륙백제에 관한 기사는 완전히 제외시켰고, 설사 인용했다 하더라도 자신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 『三國史記』의 편자들의 이런 행동은 결국 백제사를 한반도 안에만 가둬두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오히려 중국의 사서들은 대륙백제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으며, 그 성립 과정과 시기를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 측 사서 중에서도 北朝係 사서에는 보이지 않으며, 南朝係 사서에만 나온다. 이로 인해 백제의 요서진출설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주목될 때부터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양분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긍정론자들은 중국대륙이 혼란기였고 백제가 평양성까지 진출할 정도로 강성하였음을 강조하고, 중국 측 사료에 근거하여 백제가 요서지역에 晉平郡과 晉平縣을 기록하였다는 근거를 강조하는 반면, 부정론자들은 근초고왕 대를 제외하면 백제 내부 상황이 복잡하였고 요서지역도 慕容氏가 장악하고 있어 백제가 진출할 틈이 없었고,『三國史記』등 우리 사서에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중국 측 사서 가운데서도 남조 측에만 단편적으로 보일 뿐 북조 측의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상반된 이해는 부분적으로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요서진출설의 경우 직접적인 關係史料가 존재한다. 최초의 관계기사가 기록되어 있는 『宋書』는 宋이 멸망한지 10년이 채 안 된 시기인 南濟 武帝 永明 6년에 편찬되었다. 『宋書』의 내용 서술대상시기와 편찬시기의 격차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상당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특히 百濟傳은 현존하는 중국 역대 正史流에서는 최초로 입전되어 있는 것으로 前代 사실의 단순한 답습이나 재구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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