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 최초 등록일
- 2007.09.03
- 최종 저작일
- 2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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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던 皇龍寺는 新羅의 대표적 寺刹이였다. 황룡사에서는 신라의 三寶로 꼽히는 유물을 두 가지나 볼 수 있다. 특히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 황룡사의 九層 木塔의 터는 그 규모만으로도 우리를 압도시키기에 충분하다. 善德女王이 女主體制에 반대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전 임금이 행하지 못한 것을 건립함으로써 남자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게 해주었고 여자이기 때문에 위엄이 없다는 국내외 여론을 무마시켜 정치집단간 대립 관계를 극복 하게 해준 역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사찰이다. 이 글에서는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황룡사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皇龍寺址
3. 皇龍寺 創建
4. 三國遺事 속의 皇龍寺
(1) 迦葉佛 宴坐石
(2) 皇龍寺 丈六尊像
(3) 皇龍寺 九層木塔
5. 皇龍寺에 나타나 있는 新羅의 佛國土 思想
6. 三國遺事 속 皇龍寺의 歷史的 意義
7.나가는 말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던 皇龍寺는 新羅의 대표적 寺刹이였다. 황룡사에서는 신라의 三寶로 꼽히는 유물을 두 가지나 볼 수 있다. 특히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 황룡사의 九層 木塔의 터는 그 규모만으로도 우리를 압도시키기에 충분하다. 善德女王이 女主體制에 반대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전 임금이 행하지 못한 것을 건립함으로써 남자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게 해주었고 여자이기 때문에 위엄이 없다는 국내외 여론을 무마시켜 정치집단간 대립 관계를 극복 하게 해준 역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사찰이다. 이 글에서는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황룡사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2. 皇龍寺址
황룡사지는 1963년 사적 제 6호로 지정된 황룡사지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지은 皇龍寺가 있던 자리이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과 금 3만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으로 삼존불상을 만들었다. 특히 장육존상은 5m가 넘는 것으로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지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9층목탑을 짓게 되었다. 9층목탑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가 수호를 기원하여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쳐 국가 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당시 신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중요한 사찰로서 승려를 총괄하는 기능을 겸하였다. 또한 신라는 부처가 사는 땅이란 신라인들의 불교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두가지인 장육존상과 9층목탑이 황룡사에 있었다.
참고 자료
1.『三國遺事』
2.『三國史記』
3. 申東河,「新羅 佛國土思想과 皇龍寺」,『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新羅文化宣揚會, 1980
4. 조수동,「『삼국유사』에 나타난 불교사상에 관한 연구」,『哲學論叢』pp.311-336(26쪽), 세한 철학회, 2001
5. 김현준,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 효림, 2004
6. 이도흠,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푸른역사, 2000
7. 이범교외 4名, 『三國遺事의 綜合的 解釋/下 』,민족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