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쇄국정책]19세기 조선의 개항과 대원군의 쇄국정책(A+)
- 최초 등록일
- 2007.07.13
- 최종 저작일
- 20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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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세기 조선의 개항과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관해 자세하고 세밀하게 조사한 레포트 입니다.
지난학기 한국사 시간 과제물로 20점 만점에 20점 받은 자료입니다.
조선의 개항이나 대원군의 쇄국정책 관련 레포트를 작성하시는데 많은 도움 되실겁니다.
목차
< 19세기 조선의 개항과 대원군의 쇄국정책 >
1. 서론
2. 본론
1) 19세기 조선의 개항
(1) 운요호 사건
(2) 강화도조약과 서양에의 개항
2) 조선의 개혁반대 세력
(1) 조선의 위정척사 운동
3) 조선의 개화운동
(1) 수신사의 파견
(2) 제도의 개편
(3) 신사유람단과 영선사의 파견
4) 대원군의 개혁
(1) 대원군의 개혁
(2) 인재의 등용
(3) 국가 재정의 확보
(4) 서원정리
(5) 국가기구의 정비
(6) 경복궁의 증건
5) 대원군의 개혁평가
3.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운요호 사건
일본은 1875년(고종 12)에 운요 호 등 3척의 군함을 출동시켜 부산에서 무력 시위를 강행 하고, 약 3개월 후에는 조선의 동남ㆍ서해안에서 중국에 이르는 뱃길을 연구한다는 구실로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와 강화도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조선의 초지진 포대에서 강화도 해역에 침범한 운요 호에 경고 사격을 가하자 이를 구실삼아 초지진 포대를 포격하여 파괴하고, 물러가는 길에 인천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를 포격하였다. 이어, 일본군은 영종도에 상륙하여 방화ㆍ약탈 및 살상 등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이를 운요 호 사건이라 하는데, 이는 일본이 조선과의 교섭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저지른 불법적인 무력행위였다.
(2) 강화도조약과 서양에의 개항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이듬해 군함 6척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에서 다시 무력시위를 한 후, 강화도에 나타나 수교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 무렵, 조선에는 여전히 쇄국을 주장하는 세력이 컸으나, 한편으로는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개화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중심인물은 박규수ㆍ오경석ㆍ유홍기 등이었다.
결국 정부에서는 이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일본과 수교할 것을 결정하고, 신헌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1876년). 이것이 곧 강화도 조약으로, 이로써 조선은 닫혔던 문을 열었다. 전문 12조로 되어 있는 강화도 조약은 조선으로서는 최초로 외국과 맺은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일본의 침략 의도가 담긴 불평등 조약이었다.
참고 자료
대원군의 시대/ 리선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강화도의 서양함대와 대원군/ 이정범/ 서강출판사/ 20005
한국개화백년사/ 이현희/ 한국학술정보/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