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조선의 개화운동과 갑신정변
- 최초 등록일
- 2007.05.27
- 최종 저작일
- 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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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C말 시작된 개화운동에 대한 리포트 발표자료입니다.
신분, 남녀, 적서의 차별을 없애려는 사회개혁을 시도했던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 실패로 인해 청의 영향력 아래 온건개화파가 주도해 나갔던 개항 이후 갑신정변을 비롯한 갑오개혁 이전까지의 개화운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자세한 주석을 첨부하였습니다.
목차
1. 개화사상의 형성
가. 개화의 의미
나. 개화의 선구자들
다. 급진개혁파와 온건 개혁파
a. 급진개화파
b. 온건개화파
2. 개화정책의 추진
가. 개항과 세계관의 변화
나. 개화사절의 파견
다. 별기군 창설
3. 개화운동의 발전
가. 개화정책의 대립과 제도개혁
a. 친청개화정책과 갑신정변
b. 갑신정변 이후의 개화
c. 개화의 양상
4. 개화운동의 의의
본문내용
가. 개화정책의 대립과 제도개혁
a. 친청개화정책과 갑신정변
1884년 봄 안남(安南)문제를 두고 형성된 청과 프랑스의 대립관계는, 개화파에게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있는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3,000여 명 가운데 절반을 철수시켰다. 이러한 정세변화와 일본의 접근에 다시 용기를 얻었다. 1884년 9월 17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제 민씨 정권의 친청수구정책에 대항하여, 종래의 평화적 방법에 의한 개혁에서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일시에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실현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홍영식이 총판(總辦)으로 있던 우정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사관학교의 유학생, 종래의 신식군대 가운데 자신들의 영향 아래 있는 조선 군인을 동원하기로 하는 등 정변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경, 급진개화파들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민씨 척족 세력을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겨 일본군 200명과 50여 명의 조선 군인으로 호위케 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변에 성공한 개화파는 민씨세력을 위시한 수구파를 제거했다. 개화파와 왕실은 새 정부 구성을 위한 인물 배정에 착수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에도 정변의 뜻을 전달하고 지지를 요청하였다.
참고 자료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 사전 한국어판, 2004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표준국어대사전
한국근대사강의
조선의 모던보이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