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죽조황의 시조연구 三竹 趙榥의 時調硏究 요약본
- 최초 등록일
- 2007.05.03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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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조 연구에 있어서 조황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한문이 많고 텍스트화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 자료로 소장한다면 공부하기에, 편집하기에, 재인용하기에 편리할 것입니다.
목차
1. 문제제기
2. 서지적 사항과 작품 창작시기 재검토
3. 傳奇的 사실과 意識의 根底
4. 현실인식의 방향
5. 조황 시조의 당대적 의미- 결론에 대신하여
본문내용
1. 문제제기
그동안의 조선 후기 시조에 대한 연구는 주로 사설시조나 중인가객들의 작품에 집중된 감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설시조나 중인가객들의 시조가 동시대의 사대부시조에 나타나는 규범화된 미의식과 표현방법을 뛰어 넘어 조선 후기 사회의 새로운 모습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시조는 애초에 사대부들의 장르로 출발했고 한때 그들의 조화롭고 안정된 정서를 표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르로 인정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도 사대부들은 꾸준히 시조를 창작·향유하고 있었음을 잊지 않는 것도 온전한 시조사 이해에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三竹 趙榥은 141수의 시조를 자신의 시조집에 남긴 사대부 시조작가이나 그의 시조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간의 연구 성과를 보면 심재완이 ‘삼죽사류’의 서지적 사항들을 검토했으며 정명세, 조규익이 조황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들의 연구는 조황과 그의 시조 그리고 ‘삼죽사류’의 序ㆍ跋에 나타난 시조에 대한 인식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거나 서지적 사항들에 대한 검토에 머문 감이 있다. 따라서 본격적인 작가론이나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과제로 남아있다.
<중략>
조황은 완강하던 중세적 지배질서가 급격히 해체되어 가는 시대를 살았다. 19세기의 조선사회는 일대 개혁을 필요로 했고 내부적으로도 여기저기서 그런 움직힘이 일어나고 있었다. 쓰러져가는 조선왕조를 껴안고 변화를 거부하던 계층은 부패한 체계에 기생하던 지배층과 유교적 명분론을 篤信하던 일부 사대부들뿐이었다. 대세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처지가 강제하는 대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투철하게 무장하고 일생을 통해 그것을 실천했던 조황이었기에,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말년에 이르러 자신을 돌아보며 고독하고 허무한 느낌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조황 자신의 한계이겠지만 그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또 19세기의 몰락한 향촌사족의 한 전형임을 생각할 때, 그의 쓸쓸한 말년은 상당 부분 우리 근대사의 왜곡된 흐름에 그 책임이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