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일본어로 저항의식을 표출한 작가 김사량
- 최초 등록일
- 2007.03.25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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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침묵이나 협력이 아닌 일본어를 통한 문학창작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일제말 저항을 한 작가 김사량의 생애와 작품들을 시대상과 함께 바라보고 일본어가 김사량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본 리포트.
목차
1. 김사량의 삶과 전기
2. 김사량과 일본어
3. 1939년 이전의 작품 개관 경향
① 짐(荷) (1932)
② 토성랑 (土城廊) (1935)
③ 빛 속으로 (光の中に) (1939)
3. 1939~1945 작품활동
④ 천마 (天馬) (1940)
⑤ 무성한 풀숲 (草深し) (1940)
⑥ 낙조 (1940)
⑦ 지기미 (1941)
⑧ 유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1941)
⑨ 물오리섬 (1942)
⑩ 태백산맥 (太白山脈) (1943)
⑪ 노마만리 (1945)
4. 결론
<참고자료>
본문내용
「노마만리」에서는 노모와 처자식을 두고 떠나는 심경에서부터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태극기 앞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는 감동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성실하게 기록했다. 소설속의 모든 조선인들을 민족적인 차별과 잘못된 우월감의 희생자로 그려 일본 사회 속의 조선인들의 고뇌와 억압과 차별이 어떻게 인간성을 왜곡시키는가를 조명하고 있으며 식민지화가 조선민중의 궁핍상, 식민지화가 낳은 추악한 인간상을 사실적으로, 식민지와 본국에서 살아가는 피식민지인들의 고통과 고뇌를 섬세하게 추적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며 일본의 수탈과 어려운 민중들의 삶이나 친일 모리배 군상들의 모습을 다루었다.
김사량은 1944년 북경을 여행할 때까지도 해외로 간다는 것은 도피라고 생각했었으나 1년 후 연안으로 망명하면서 그때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북경 여행 후 일본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김사량은 탈출을 꾀한다. 노마만리를 통해 일제의 총칼 아래 무릎 꿇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후회하고 그 이전의 막연한 조선민중의 삶에 대한 동경과 두 세력 사이에서 방황하는 어중간한 인물 묘사에서 벗어나 항일무장하여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의지를 나타내었고 항일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일본어로 작품들을 썼고 일본인들을 벗으로 삼아 많은 교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사량을 친일파로 규정하기엔 「노마만리」나 「빛 속으로」의 무게가 매우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4. 결론
다른 저항 작가에 비해 김사량은 한국근대문학사에서 크게 평가받지 못했다.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로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협력인가, 저항인가에 대한 논의 때문에 일본어로 작품을 쓴 작가로서 문학사적 위치는 높게 평가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 알아본 김사량은 단순히 일본어로 문학 활동을 한 작가로서 소홀히 다뤄져서는 안 될 진정한 민족주의 작가로 일본어를 사용해 자신의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 하지만 그 일본어 선택이 내선일체 정책에 의핸 굴복이나 적응이 아니라 일본어로 글을 써 일본인과 나아가서는 세계에 조선이 처한 현실을 알리고 식민지 본국에 고발하며 폭력적인 신민통치의 부당함을 알리고자하는 사명감을 갖고 이를 표출하기 위해 일본어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에 김사량은 일본어로 소설을 쓰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일본어는 식민지 본국의 지배어가 아닌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펼칠 또 다른 하나의 언어로서 조선어와 대등한 위치에 놓인 다른 언어일 뿐이었다.
즉, 그의 일본어 선택은 전략이 아니고 전술 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편협한 시각으로 당장 보이는 전술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전술을 넘어서 전략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김사량의 작품세계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선주원 「식민지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 읽기 - 해방 전 김사량의 소설을 중심으로-」
최광석 「김사량의 초창기 문학연구」
秋錫敏 「金史良硏究 : 『堤防』 揭載作品の檢討」東國大學校日本學硏究所
손은정 「김사량 문학 연구」
안우식 「아리랑의 비가:민족주의 작가 金史良의 비극적인 생애」 열음사
박노갑 외 「우리 시대의 한국 문학.39:현대 소설」소담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