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와 개화사상, 어느쪽인가
- 최초 등록일
- 2007.02.26
- 최종 저작일
- 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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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위정척사와 개화사상, 조선말을 뒤흔든 두 사상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해 본 레포트입니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요. 두 사상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나아갈 점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목차
Ⅰ. 위정척사 사상
Ⅱ. 개화사상
Ⅲ. 두 사상에 대한 나의 평가
본문내용
Ⅰ. 위정척사 사상
19세기에 들어서 조선은 안팎으로 커다란 모순과 도전에 부딪쳤다. 국내적으로는 양반 관료 정치가 더욱 타락하여 세도 정치로 이어졌다. 정치가 국왕 외척의 손아귀에서 좌우되었으며, 관직을 매관매직(賣官賣職)하는 등의 탐욕스런 관리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삼정(三政)은 탐관오리들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된 지 오래였고 이로 인하여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이에 민중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양반들의 부당한 지배에 저항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1862년의 임술농민항쟁이었다. 전라․경상․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70여 개 지방에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외부로부터의 도전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침략적 접근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의 자본주의는 세계적 규모로 발전하여, 원료 공급 기지와 상품 시장으로서 식민지를 필요로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85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와 동남아시아 일대를 집어삼켰고, 1840년 영국의 아편전쟁 승리와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함락 이후로는 중국을 야금야금 먹어들어 갔다. 중국이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미국과 러시아 또한 중국에 진출하였다.
조선의 해안에도 이들 서양 세력의 선박이 자주 출몰하여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조선에서는 증기로 움직이는 이 배들을, 모양이 특이하다고 하여 `이양선` 또는 `황당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처음에는 식량과 식수를 요구하며 접근하다가 노골적으로 통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1840년 무렵부터는 침략의 본색을 더욱 생생히 드러냈다. 전라도의 해안 지역만 하여도, 영국 배 사마랑호가 20여 일에 걸쳐 흥양(고흥) 초도, 강진 여서도, 장흥 평일도 등을 측량하였다. 또한 흑산도에 이양선이 출현하고 러시아 함대가 세 차례나 거문도를 침입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한영우 著,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1997, pp 419 ~ 430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編, 조선통사, 오월, 1998, pp 523 ~ 527
이덕일 ; 이희근 著,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김영사, 1999, pp 288 ~ 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