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분가와 면앙정가에 드러나는 갈등 양상
- 최초 등록일
- 2006.12.28
- 최종 저작일
-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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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분가와 면앙정가에 드러난 갈등의 양상에 대해서 비교, 분석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만분가>
<면앙정가>
본문내용
1. <만분가>
조위(1454∼1503)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창녕이다. 1474년(성종 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검열이 되고 1476년부터 사가독서한 뒤 1479년 영안도경차관이 되었다. 수차에 걸쳐 시제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떨쳐, 성종의 총애를 받아 경연에 나갔다. 1485년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하여, 표리·녹비 등을 하사 받았다. 그 후 도승지·호조참판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95년(연산군 1년) 대사성으로 춘추관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관 김일손이,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하여 올리자 그대로 편찬케 하였다. 후에 중추부동지사로 부총관을 겸직했고, 1498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는 도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의주에서 피체되어 투옥되었으나 이극균의 극간으로 의주에 장류되어 순천에서 죽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함께 신진사류의 기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금산의 경렴서원, 황간의 송계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는 ”매계집“, 글씨로는 ”조계문묘비“가 있다.
<만분가>는 조선 연산군 때 지은 유배가사로 국한문혼용체로 되어있다. 2음보 1구로 계산하여 127구이며, 3,4조와 4,4조가 주조를 이루고 2,3조, 2,4조 등도 더러 있다. 안정복의 “잡동산이” 제 44책에 수록되어 전한다. 작자가 1498년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유배되어 전라도 순천에서 지은 가사이다. 유배가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지은이가 사화에 연루되어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유배된 뒤 귀양살이하는 원통함을, 천상에서 하계로 추방된 처지에서 옥황상제로 비유된 성종에게 하소연하고 있는 내용이다. 작품의 가의가 굴원의 “천문”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정철의 “사미인곡”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만분가>를 1행에서 10행까지의 서사, 11행에서 120행까지의 본사, 121행부터 끝까지의 결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사에서는 임금이 계신 곳을 “천상 백옥경 십이루”, “자청전”, “삼청동”등 도가적 천상시계로, 그리고 자신이 처해 있는 곳을 지상 세계로 설정하여 자신의 유배 상황을 천상에서 유배되어 지상으로 하강한 인간의 처지로 그리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