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과 전개, 그리고 정책에 관한 리포트
목차
Ⅰ. 서론
Ⅱ. 연개소문 정권 성립배경과 전개과정
1. 고구려 후기의 국내외정세
2. 연개소문 정권의 지지기반과 전개과정
Ⅲ. 연개소문 정책
1. 권력집중화 정책
2. 종교,사상 정책
3. 대외정책
Ⅳ. 결론
본문내용
고구려 후기는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6세기 이후 고구려 내부 상황을 보면 왕권을 중심으로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시기의 고구려는 安臧王~陽原王 시기인데, 우선 안장왕대를 살펴보면 『日本書紀』계체천황 25년(531년) 12월 기록에는 고구려가 그 왕 安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2 여기서 안은 안장왕을 말한다. 이는 그가 정상적으로 왕위를 마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안장왕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安원王代의 기록을 보면『日本書紀』흠명천왕 기록에는 6년(544년)과 7년 두 번에 걸쳐 큰 난리가 났음을 백제 유민들이 쓴 『百濟本紀』를 인용하여 전하고 있다. 6년 기록에는 “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이 일어나서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 『백제본기』에서 말하기를 12월에 고구려국의 細群과 鹿群이 궁궐문 밖에서 북을 울리며 크게 싸웠다. 세군이 졌으나, 3일 동안 군대가 철수하지 않고서 세군의 모든 자손들을 잡아다가 죽였다. 싸움이 일어난 지 5일 만에 향강상왕(안원왕)이 죽었다”고 한다. 7년 기록에는 “『백제본기』에서 말하기를 고구려는 정월에 中夫人의 아들을 세워서 왕으로 했다. 나이 8세였다. 고구려왕(안원왕)은 正夫人에게는 아이가 없었는데 中夫人이 세자를 낳았다. 그 사돈 집안이 鹿群이다. 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사돈 집안이 細君이다. 고구려왕이 병들어, 세군과 녹군이 각각 그 부인의 아들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므로 細君의 죽은 자가 2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4 이 기록은 기족들이 자신들의 외손자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한 것을 알려주는데 죽은 자가 2천여 명에 이를 정도라면 두 가문만이 아니라, 귀족 사회 전체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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