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천주교)수용과 외국관계에 관한 소고
- 최초 등록일
- 2006.12.25
- 최종 저작일
- 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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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란 이후에서 개항기인 1875년까지의 조선사회 변동을 외교관계와 천주교, 즉 서학의 수용 이해에 있어 특히 종교 신앙의 면에서 살펴보고, 서학 수용을 基幹으로 한 외교관계가 조선에 끼쳐준 변동이 가져온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서학수용의 정신적 기반
Ⅲ. 서학배격의 기본이념
1. 신해박해
2. 신유박해
3. 기해박해
4. 병오박해
5. 경신박해
6. 병인박해
Ⅳ. 외국관계
본문내용
Ⅱ. 西學受容의 精神的 基盤
한국의 근대사상의 틀에서는 近世儒家들의 서학수용에 있어 어떠한 接觸點에서 融合할 수 있었는 지를 찾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이것은 후대적인 이해를 전제로 내세운 얘기이나, 종전 朱子學至上主義社會였던 조선의 公利的인 측면에서 새로운 정신으로 서학을 수용했다고 하던 견해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 서학은 기독교사상으로만이 아니라 르네상스기의 서구 과학지식과 기술을 함께 전하게 되는데서 중국문화권의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실용적인 자연과학기술면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나 유클리드 기하학 등의 과학지식은 전통적 중국과학기술에 의존하여 오던 朝鮮學人들에게는 무엇보다 驚異的인 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에 유의한 학인들 곧 合理實證精神은 임란 후 현실인식에 기반을 두고 국가재정의 복구, 제도의 개혁을 지원한 이른바 現實學派의 학인들에게 있어 注視할 만한 새로운 지식이었다. 이와 함께 天主實義를 비롯하여 七克 등의 기독교를 이해시키고 신앙을 실천케 할 책자가 함께 전해오자, 정신적으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게된 합리적인 학인들로는 주자학적인 이념과의 비교, 검토에 앞서 새 책자 속에서 신의 존재와 기독교윤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조선학인은 유교윤리의 기반에서 생각하고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천주실의의 독해는 용이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종전의 생각 이외의 것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호 이익, 광암 이벽, 권철신․권일신 형제, 다산 정약용 등의 학인들이 經學의 이해와 함께 서학을 이해하였음은 유교주의정신의 기틀에서 천주교를 이해하고 신봉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이 학인들은 대내적으로는 퇴계 이황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 존중하였었지만, 사회적 개혁을 지원하는 데는 儒敎的 民本思想과 西學精神의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서학을 신봉하던 남인학자들은 이러한 정신적인 기반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왔으나, 정치적으로 권력을 상실한데서 개혁론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西學排擊의 契機를 초래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이원순, 한국서학사연구, 일지사, 1986.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조 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