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화성성역의 배경
1-1. 영우원 천봉
1-2. 신읍치의 건설
2. 화성 성역
2-1. 축성의 결정
2-2. 화성 성역의 경과
2-2-1. 축성계획
2-2-2. 인력동원
2-2-3. 축성재료와 신기기
2-2-4. 화성의 완성
2-3. 화성 성역과 비난시비
2-4. 화성 성역에 비친 정조의 정치구상
2-4-1. 화성 성역과 군권 장악
2-4-2. 천도문제
2-4-3. 정조 정치의 한계
3.화성의 특징과 우수성
3-1.화성의 특징
3-1-1. 화성의 복합적 기능
3-1-2. 실학 정신의 반영
3-2. 18세기 문화예술의 결정체
4. 화성의 민족사적 교훈 및 의의
4-1. 국가적 역량의 총체적 역사
4-2. 화성의 의의
결론
본문내용
언젠가 수업시간에 ‘화가는 사회에 아무 필요도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말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화가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만큼 예술가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말씀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미술을 포함한 예술이라는 영역이 사회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우리가 잘 아는 피카소의 경우,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다.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살았던 그에게 있어 살아 생전의 세계는 개인적으로 수많은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개인적으로는 무신론자로서 자신의 작품 이외에 남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그림, 판화, 조각, 데생, 콜라주, 도자기 등 모두 4만 4천여 점의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겼던 화가였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렇게 만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가 겪어야 했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을 비롯해서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등 수없이 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자행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전쟁을 증오했고, 두려워했다. 그가 이런 전쟁과 대학살을 바라보며 남긴 그림들은 지금까지 우리 곁에 남아 전쟁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바로 <게르니카>(1937년), <납골당>(1945년),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전쟁과 평화>(1954년) 등 대량학살과 폭력을 증오하는 대작들을 남긴 것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납골당>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예술가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두 그림이 피카소의 전형적인 작품은 아니라는 점이다. 피카소의 작품들은 다른 어떤 예술가들의 작품 이상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작품들이지만 <납골당>과 <게르니카>는 예외적인 작품이었다. 왜냐하면 피카소는 일생 동안 정치적 작품들의 창작에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러한 작품을 그리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작품이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받아서 위의 피카소의 예처럼 정치적 성격을 띤 예술작품을 완성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런 경향은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음악, 책, 영화 등의 분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의 예술계의 경우도, 위와 상통하는 예가 있을 것이라 사료되는 바, 우리는 수원성(화성)이라는 건축물을 통해 정치와의 연관성을 살펴 보려한다.
참고 자료
■박광성, 「정조의 현륭원 전배」 《기전문화연구》10, (인천대학 기전문화연구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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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용, [탕평론의 전개와 정국의 변화]《한국사론》10, 서울대국사학과, 1984.
■정옥자, 《조선후기문화운동사》(일조각,1988).
■박광용, 「붕당정치와 탕평」 《동양학》19,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