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수도 천도에 따른 왕권과 귀족세력의 변화
- 최초 등록일
- 2006.12.06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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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 사회에서 수도는 지배자 공동체의 생활공간이면서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기에 천도(遷都)는 바로 중심지의 이동을 뜻하는 것이다. 백제(百濟)는 두 번에 걸친 천도를 하게 되는데, 한성(漢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웅진에서 다시 사비(泗沘)로 행해진다. 한성에서 웅진으로의 천도는 고구려의 한성침공에 의한 개로왕(蓋鹵王)의 참사와 한성의 함락으로
목차
머리말
1. 한성 말기와 웅진 천도 초기의 상황
1) 개로왕 대의 왕권
2) 한성 함락
3) 웅진 천도 초기 (1) ― 文周王 代
4) 웅진 천도 초기 (2) ― 三斤王 代
2. 웅진시대 왕권의 안정
1) 동성왕(東城王)의 즉위
2) 동성왕 대의 귀족 세력의 변화(남래귀족 vs 신흥귀족)
3) 왕권 강화 시책
4) 무령왕 즉위와 정국운영의 안정
3. 사비천도와 정치체제의 변화
1) 사비천도와 지배체제의 변화
2) 성왕 대의 대외 관계
3) 관산성 전투 후 변화 모습
4. 왕권의 전제화와 백제의 멸망
1) 무왕 대의 왕권과 익산(益山) 경영
2) 무왕 대 익산(益山) 경영
3) 무왕 대 대외 관계
4) 의자왕 대 대외 관계
5) 의자왕 대 전제왕권의 확립
6) 지배층의 분열과 멸망
맺음말
본문내용
머리말
고대 사회에서 수도는 지배자 공동체의 생활공간이면서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기에 천도(遷都)는 바로 중심지의 이동을 뜻하는 것이다. 백제(百濟)는 두 번에 걸친 천도를 하게 되는데, 한성(漢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웅진에서 다시 사비(泗沘)로 행해진다. 한성에서 웅진으로의 천도는 고구려의 한성침공에 의한 개로왕(蓋鹵王)의 참사와 한성의 함락으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고, 웅진에서 사비로의 천도는 성왕이 왕권 및 중앙집권적 지배질서의 강화를 도모하고, 과거 백제의 위용(偉容)을 다시 찾고자 하는 계획적인 것이었다. 梁起錫, 「百濟 聖王代의 政治改革과 그 性格」, 『韓國古代史硏究』 4, 1991, p. 77.
이러한 백제의 두 번에 걸친 천도과정에서 보이는 제 양상들을 시대별로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한성 말기와 웅진 천도 초기의 상황
1) 개로왕 대의 왕권
♣개로왕은 백제 21대 왕이며, 비유왕(毗有王)의 장자(長子)로 455년에 즉위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즉위부터 14년 초까지 기사가 없고 부친의 무덤조차 조영되지 않은 채 방치 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권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즉위하였고, 즉위 당시에는 왕권이 불안정했지만 신하들에게 작호를 제수하고 대토목공사를 시행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즉위 이후 어느 정도의 왕권을 확립하였다.
2) 한성 함락
- 즉위 후 21년에 고구려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었다.
①국내적 요인 :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왕비족(해씨, 진씨) 대신 왕족을 등용하면서 권력다툼 발생하였고, 권력집중을 위한 무리한 대토목공사(왕성수리, 궁실조영, 변방 성 축조)를 실시하였다.
②국외적 요인 : 국제 관계의 변화로 국내적 요인보다 더 크게 작용하였다. 고구려는 장수왕이 즉위한 이후 남하정책으로 팽창을 도모하였다. 북위(北魏)와의 외교실패로 왜(倭)에 왕제(王弟)인 곤지(昆支)를 보내어 그 관계를 긴밀히 하였지만 실제 한성이 함락될 때에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