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정한론에 대한 발표 리포트 입니다.
목차
1. 「정한론」의 정의
2. 「정한론」의 전개
3.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
4.정한론 연구
본문내용
1. 「정한론」의 정의
일본의 지배층이나 식자들은 오랜 옛적부터 기회만 있으면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ㆍ합병시키고자 하는 그릇된 생각을 가져왔다. 국력이 강해지거나 내분이 생겨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어김없이 해외 팽창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침략전쟁을 전개하였다. 또 어김없이 그 일차적인 목표를 한국에 두고 있었다. 일본사의 교과서적 고전인《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일본의 건국신화 및 고대국가 건립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중 일본의 건국신화는 `신대(新代) 상 · 하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신대 상`은 1)신대 7세, 2)팔주기원, 3)사신출생, 4)서주맹약, 5)보경개시, 6)보검출현으로 되어 있고, `신대 하`는 천손강림(天孫降臨) 등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건국신화 중 `신대 상`-2)팔주기원 편에 `담로(擔魯)`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담로는 백제의 통치기구로 일본국 기원은 담로, 즉 백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일본의 천황(天皇)이라 일컬어지는 국왕들 전부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국가인 고조선 및 부여, 백제, 가야, 고구려, 신라라는 사실은 현재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요즘 일본 왕실에서 자신들의 뿌리가 백제라고 밝히는 것을 보면, 백제가 일본에 끼친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식민지 경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에 나오는 신화에서부터 일본이 신화 한국을 경영하였다는 허무맹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정한론이란 명치 6년 조선과의 외교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정벌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에코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와 그것에 반대한 오쿠보 도시미치, 기토 다카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등이 격하게 대립하여 사이고 일파가 패하여 저치의 무대로부터 그 모습을 감춘 일본 근대 초기의 정치정변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당시 정한론(征韓論)의 「한(韓)」이 아닌 「조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 모리 도시히코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
“ 조선국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칭한 것은 1897년(명치 30)이기 때문에 그 이전의 시기에는 정한론에서 《한(韓)》을 사용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부정확한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그렇지만 관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 정한론이 일어난 시기의 국명은 「조선」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한」을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역사가에 다른 정한론의 연구가 늦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정변」으로 인하여 정권의 중심에서 밀려난 에토 신페이는 사가의 난을 일으키지만 패배하여 사형을 당하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세이난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즉, 사이고 다카모리나 에토 신페이는 명치 정부에게 있어서 보면 반역자들이었으며 더욱이 자유민권운동의 리더인 이타가키 다이스케나 고토 쇼지로는 때로는 정부에 관여하거나 참가하는 것은 있어서도 정부, 즉 삿초한파쓰의 적으로 간주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유사전제권력 하에서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정변」에 관한 연구 성과를 공표하는 것을 꺼렸던 것 같으며, 사건에 관계하였던 사람들이 대부분 생존해 있었던 19세기말까지는 눈부신 연구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 자료
<김지용과 함께 읽는 한,중,일 500년사>, 김지용, 새로운 세상, 1999
<한국에서 쓴 일본역사이야기>, 박찬수, 솥출판사, 2003
<일본역사 탐구>, 구태훈, 태학사, 2002
<정한론과 조선인식>, 장용걸, 보고사, 2004
다수의 인터넷 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