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대당 군사 동맹과 삼국통일
- 최초 등록일
- 2006.11.01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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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의 삼국통일을 위한 대 중국 군사 외교와 고구려의 중국에 대한 항쟁 내용입니다
대학원 발표 레포트로 내용 보장합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1)중국 통일왕조의 등장과 고구려의 시련
2)세계 제국 당과 맞써 싸운 고구려
3)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신라의 몸부림
4)동맹 외교의 빛나는 성과
3.결론
본문내용
I. 서 론
7세기 한반도는 중국대륙의 정세변화에 민감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동란의 세기는 그 뒤 한민족의 역사에 있어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신라는 북의 고구려와 서의 백제가 협공하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강한 외세의 세력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맹렬한 백제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김춘추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에게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사실상 결렬되었기 때문에 신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이후 신라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능란한 외교술로 당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660년 백제를 멸하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자주적인 통일을 하지 못한 불완전한 통일에 그쳤으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고 우리역사의 큰 줄기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 고구려는 귀족 간에 권력다툼으로 내분이 있던 상황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보장왕(寶藏王)을 옹립하였지만 사실상의 실권은 연개소문이 장악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정권장악 후 대다수의 반대파를 숙청하였지만 체제내의 뿌리 박혀 있는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권을 연명할 수단으로만 사용하였으므로 연개소문은 고구려내의 완벽한 정권장악에는 실패한 셈이라 하겠다. 연개소문은 정변 후 대대로가 된 후에도 재차 귀족회의 중심의 형식을 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연개소문이 귀족회의의 주도권을 잡아 권력의 핵심에 위치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일족 이외의 귀족 세력을 회의체에 끌어들여 권력의 안정화를 추구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안시성주와 같이 집권 초기엔 무력을 보유한 반대 세력이 상당히 존재하였고, 연씨 집권 기간에도 이탈하려는 귀족들이 있었다.
노태돈,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이에 연개소문의 당에 대한 강경한 자세와 신라의 군사적 요청을 거절함으로서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에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자초하게 된다.
참고 자료
《한국사 -삼국의 정치와 사회1》, 국사편찬위원회, 1996,
《한국사 -삼국의 정치와 사회3》, 국사편찬위원회, 1996,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이기동, 신라의 대당 군사동맹과 삼국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