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카이사르
- 최초 등록일
- 2006.10.28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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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시대의 유능한 정치가이자, 용감한 장군이자, 뛰어난 문학가였던 카이사르에 대한 글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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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 사람을 한 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는 탁월한 정치가였으며 뛰어난 웅변가였다. 그리고 훌륭한 장군이었으며 문학적인 재능도 매우 특출했다. 그가 직접 쓴 《갈리아 전기》,《내란기》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그리고 그는 엄청난 빚을 지닌 빚쟁이였으며,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카이사르는 이른바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리 부유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귀족 가문의 아들이었던 만큼, 웬만한 교육은 다 받았다. 이는 그의 어머니였던 아우렐리아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훗날 로마의 지배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기초적인 교육을 모두 학습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어려서부터 민중파와 원로원파의 극심한 대립을 보면서 자랐다. 이는 그의 고모부였던 마리우스 L.C.술라의 정적이다. 이탈리아의 지방도시 알피눔의 농민 출신으로 7차례나 집정관을 지냈다.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더욱이 BC 107년에는 누미디아의 유구르타에 대한 군지휘권을 획득하였고, 부관 술라의 조력에 의해 유구르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게르만의 킴블리 테우토니인의 이탈리아 침입을 막았다. 그 동안에 시민군단제도에서 직업군인제도를 향한 군제의 결정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BC 88년에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군지휘권을 둘러싸고 술라와 다퉈 한때 아프리카로 도피했으나,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에 출진 중인 틈을 타 이탈리아로 돌아와, BC 87년에 로마시에서 술라파에 대한 대학살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술라가 동방에서 돌아오기 직전에 병사하였다.
의 영향이 컸다. 마리우스는 민중파의 대표적 인물로 원로원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술라 하급귀족의 집안에 태어나 BC 107년 마리우스의 부장으로, 아프리카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와의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유구르타를 사로잡음으로써 전쟁을 종결시켰다. BC 104∼BC 101년 킴브리 등 게르만족의 침입을 맞아 마리우스의 막하에서 싸웠다. 동맹도시 전쟁에서도 공을 세워 BC 88년 콘술(집정관)이 되었다. 폰투스왕 미트리다테스 정벌군의 지휘권을 둘러싸고 마리우스 일파와 대립하게 되자, 로마로 진군하여 호민관 술피키우스를 살해하고 마리우스를 추방하였다.
그리스 ·소아시아 등지에서 미트리다테스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본국 정정이 불안해지자 미트리다테스와 휴전을 맺고, 귀환하여 마리우스파를 몰아내었다. 그 후 BC 83년부터는 일종의 공포 ·반동정치를 펴 정적을 몰아내고, 몰수한 정적의 토지를 노병들에게 분배하였다. BC 82년 ‘국가재건을 위한’ 독재관이 되어 호민관 및 민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원로원 지배체제의 회복을 위한 각종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BC 79년 돌연 독재관을 사임하고 캄파니아에 은퇴하였는데,
참고 자료
✡ 로마인이야기-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76
✡ 로마인이야기-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 카이사르의 죽음,
✡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 카이사르의 내전기
✡ 로마, 절대권력의 길을닦다, 아다 가부치 지음, 정은진 옮김, 예경, 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