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 최초 등록일
- 2006.10.18
- 최종 저작일
- 2006.01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신사참배에 대한 리포트
목차
1. 序論
2. 本論
1) 韓國에서의 神社參拜 실시와 皇民化정책
2) 神社參拜 拒否運動
3) 拒否運動의 意義
3. 結論
4. 參考文獻
본문내용
1) 한국에서의 神社參拜 실시와 皇民化정책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신사제도는 朝鮮總督府가 설치되면서 한국인들에게 天皇制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로 확대되었다. 總督府는 1915년 ‘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에는 朝鮮神社가 朝鮮神宮으로 개칭되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위기에 직면한 일본경제는 그 탈출구로 대륙진출을 꾀하면서 1931년에는 만주를 침략했고, 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감행했다. 이런 대륙침략정책이 추진되면서 이를 밑받침하기 위해 內鮮一體를 표방한 皇民化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는데, 神社參拜는 그 중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본격화되어, 신사 중심으로 애국반이 편성되고 神社參拜, 궁성요배, 국기게양, ‘皇國臣民誓詞’ 제창, 근로봉사의 월례행사가 강요되었다. 또한 각 가정에 神棚설치, 신궁의 부적 배포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찰 안에 감시대를 조직하고 애국반 안에 밀정조직을 만들어 이를 감시하게 했다. 한편 1936년 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어 皇民化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별로 재정비․신성되었다. 이에 따라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2) 神社參拜 拒否運動
神社參拜 拒否運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에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사들을 찾아가 神社參拜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 내지 경고한 ‘神社參拜 강요금지 청원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일제의 강요와 제도권 교회의 불법적 결의에 순교를 각오하고 끝까지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한 ‘神社參拜 拒否 권유운동’이다. 32년 초부터 일제의 神社參拜 강요가 각 지역 기독교계 학교에서 해마다 문제가 되자, 34년 장로회 총회장은 총독에게 2차에 걸쳐 청원서를 제출하려 하였으나, 일제 당국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듬해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神社參拜 거부 사건 이후 일제는 神社參拜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마저도 금지시켜 이러한 청원운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평남의 박관준 장로는 神社參拜 거부로 교사직을 사직하고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을 대동하고 1939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요인들을 만나 神社參拜 강요저지를 호소하고, 같은 해 3월 종교통제를 목적으로 한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제 74회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 반대, 기독교의 국교 화․神社參拜 강요금지, 양심적 교역자 투옥 철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경고장을 단상을 향해 투척하였다. 김선두 목사도 일본 유학생 김두영과
참고 자료
- 박경식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 청아출판사, 1986
- 김승태 《한국기독교와 神社參拜문제》 한국기독교역사 연구소, 1991
- 최원규 《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사회》 청아출판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