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가야의 역사와 그 의미
- 최초 등록일
- 2006.10.18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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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야의 역사와 문화 리포트입니다.
목차
Ⅰ. 序論
Ⅱ. 伽倻諸國의 形成
1. 考古學的 자료로 본 伽倻
2. 伽倻의 時代區分
Ⅲ. 伽倻의 産業의 發展
1. 農水産業
2. 製鐵業
Ⅳ. 伽倻의 文化
1. 土器와 冠帽
2. 音樂과 文學
3. 사상과 풍속
4. 新羅, 百濟, 왜와의 관계
Ⅴ. 伽倻의 滅亡
1. 滅亡過政
2. 滅亡의 要因
Ⅵ. 結論
Ⅶ. 參考文獻
본문내용
Ⅰ. 序論
伽倻가 國家 성립 이후부터 6세기 중엽까지 新羅와 百濟 사이에서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적 저력과 주체적인 역사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伽倻의 건국은 百濟 ․ 新羅와 동시대에 이루어졌으며 6세기까지 강력한 국가로서 존립하였고, 그들의 배후집단인 가야계 왜세력과 결속하여 新羅 ․ 百濟와 대등한 위치에서 국가를 영위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伽倻 諸國에 대한 인식이 극히 부족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선 伽倻史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자세가 三國時代라는 개념의 틀 속에서 伽倻를 단순히 新羅와 百濟의 부수적인 존재로 보고 결국 新羅에 의해 병합되어 버린 소집단으로만 인식하는 식이었다는 점이다. 또 伽倻史에 관한 연구가 부진했던 다른 이유는 伽倻 諸國을 왜와 표리일체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종래 ‘왜’를 현재 일본의 전신으로 생각하여 왜의 세력이 한반도에 도입된 것은 伽倻와 왜가 손을 잡았기 때문이며, 바로 이 왜가 곧 伽倻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伽倻史는 곧 일본고대사의 중심인 ‘임나일본부’설의 요체라는 점에서 연구가 더욱 금기시 되었다.
伽倻史에 관한 연구는 자료상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연구 방법론상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伽倻史 연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고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많은 伽倻地方의 발굴을 통하여 인멸된 실증적 사료가 제시됨으로써 伽倻史 연구의 전환점을 이루게 된 것이다.
가야사회의 제반 성격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종합하여 이 사회의 歷史的 성격을 다른 시각에서 검토하고 체계화시킨 다음 인접지역인 왜지에 끼친 영향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Ⅱ. 伽倻諸國의 形成
1. 考古學的 자료로 본 伽倻
伽倻 諸國은 구야국이 성립되기 이전의 소규모로 구성된 개별적인 소정치 집단들의 통합 변천과정이 그 모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잠정적으로 B.C. 3세기경부터 B.C. 1세기경까지로, 이 시기를 伽倻 諸國의 바탕이 마련되는 태동기로 볼 수가 있다.
따라서 伽倻는 『三國遺事』가락국기의 설화적인 기록처럼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며 삼한 중 변한을 계승 발전시킨 이 지역의 수많은 정치집단인 소국 형태가 동질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기반 위에서 발전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이 시기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연구 결과의 분석을 그 토대로 하는 연구 결과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으며, 김해시와 김해군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新石器時代의 유적으로부터 B.C. 1세기 전후 시기의 유물 유적을 통해 고찰할 수가 있다.
참고 자료
伽倻의 숨결, 하종갑, 1986, 우석출판사
신편 伽倻史, 윤석효, 1997, 혜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