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골품제를 통한 신라사회의 이해
- 최초 등록일
- 2006.10.10
- 최종 저작일
- 2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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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두품제의 성립
1) 두품제의 성립
2) 육두품의 위치
3. 육두품의 구성
1) 육성출신과 고구려․백제․가야계
2) 육두품의 위치
3) 족강 진골계
4. 전제왕권과 육두품
1) 지배세력의 재편과 왕권의 강화
2) 관료제의 강화와 육두품
5. 맺음말
본문내용
왕권 강화의 또 다른 방향은 바로 관료적인 질서의 확립이었다. 무열왕대에 시작된 관료화 작업은 문무 왕대에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법전의 정비, 입법관서의 정비, 그것에 바탕을 둔 행정관서의 확충․정비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은 문무왕이 그의 유언을 통해 율령과 격식에 불편함이 있는 것은 곧 개시하라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다.
통일기 신라에서는 유교를 정책적으로 적극 권장하였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그 정치 체제가 전제왕권의 확립과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의 강화를 위하여 충(忠)․효(孝)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적 정치이념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또 성골귀족의 불교적인 지도 정신과 세계관을 넘어 학문과 지식을 통한 통치 질서의 방향이 진지하게 모색된다.
이 같은 배경 하에 관료지향적인 성격이 강하나 진골에 가리워져 이렇다할 활동이 없었던 육두품과 국왕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 이유는 국왕은 유교정치 이념을 도입하여 전제권을 강화하고자 했고, 육두품은 골품제의 제약 하에서 유학이라는 학문을 통하여 정치적 진출을 도모하였기 때문이다. 신문왕 2년에 유학교육 기관인 국학이 설립되었다. 신문왕의 국학의 정비가 김흠돌난이 평정된 이듬해인 신문왕 2년(682)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신문왕이 관료의 자질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 나머지 관료의 양성, 배출이라는 시대적인 요청에 적극 부응하기 위한 조치로 보이기 때문이다.
국학에서의 교육은 3과로 나누어 실시되었는데, 3과에서 가르친 서목(書目)은 다음과 같았다. 1과는 논어․효경․예기․주역, 2과는 논어․효경․좌전․모시, 3과는 논어․효경․상서․문선이다. 이중에서도 논어와 효경이 필수과목이었고, 거기에 오경과 문선이 더해지고 있었다. 이는 국학에서의 교육이 경학을 위주로 하고 거기에 문학이 부수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국학의 목적이 도덕 정치 이념의 교육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 국학의 입학 및 재학조건을 살펴보면 육두품을 위한 관료양성기관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입학자격을 보면 부사(夫舍)이하 무위(無位)에 까지 개방되어 있었다. 9년 동안 수학을 하고 난 뒤에 관등이 내마나 대내마에 이르렀다는 규정은 국학의 학생이 주로 육두품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첫째 내마가 될 수 없는 사두품은 입학하지 못했을 것이고, 둘째 대내마가 승진할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오두품에게도 매력은 없었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국학을 졸업한 뒤 관등이 내마나 대내마가 되는 것에 대해서 진골은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육두품은 국학을 기반으로 삼아 집사부 시랑 등에 임명됨으로서 정책을 수행하는데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국왕이 그의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집사부를 통하여 육두품과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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