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관을 가지고 있다. 귀화한 외국인들도 자신의 이름을 짓고 본관을 정한다. 또한 이름을 물어볼 때 본관이 어디인지도 함께 묻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본관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어떻게, 왜 만들어지고 사용되어졌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본관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지고 있다. 조선 중․후기 유학자들은 대개 본관을 성관(姓貫)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근대적 학문방법으로 연구하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주로 문벌이나 친족제도를 연구하면서 본관제를 다루었고, 본관제를 씨족관념, 문벌의식의 산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와 다른 관점에서 본관제를 고려시기 군현제도의 특수한 편성방법과 관련하여 이해하려 하였고 이러한 연구경향은 고려시기의 군현제나 부곡제 등 사회사를 연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연구를 통해 본관제가 지니는 사회적 의미는 상당 부분 밝혀졌으나, 하나의 사회제도로서의 본관제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사 연구는 다각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사회제도로서의 본관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본관제의 성립 배경과 본관제의 특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본관제가 고려 초에 성립되었으므로 나말 여초의 시대 상황을 살펴본 후, 본관제의 성립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본관재의특성을 계서적(階序的) 특성과 영역규제의 특성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목차
1. 머리말
2. 본관제의 성립 배경
1) 나말 여초의 시대 상황
2) 본관제의 성립
3. 본관제의 특성
1) 계서(階序)적인 지방제도
2) 영역규제
4. 맺음말
본문내용
2) 본관제의 성립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혼란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고려는 지방사회에서의 극심한 세력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농민의 몰락과 유망을 막아 경제적 안정을 이룩해야 했다. 게다가 고려사회는 농업기술 수준이 완전한 상경농법(常耕農法)단계에 도달하지 못하여 농민들은 안정적인 가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농민들은 개간 혹은 재해로 인해 이동이 잦았다. 그래서 고려 왕조는 농민을 직접 지배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농민을 간접적으로나마 지배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따라서 그에 맞는 새로운 제도가 성립되어야할 시기였다. 이때 성립된 제도가 바로 본관제이다. 본관제는 나말 여초에 발생한 유민들을 적의 재 정비작업으로 국가의 통치 속에 편입시키고, 토성분정(土姓分定)을 통해 지배계층을 재정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본관제도의 성립시기를 바로 전해주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성립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본관이라는 용어가 쓰인 사료로서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다음과 같다
(목종) 4년년..... 왕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살피다가 장단현(長湍縣)에 이르렀다. 한언공(韓彦恭)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경의 본관이다. 경의 공로를 생각해서 단주(湍州)로 승격함이 가하다.”(「고려사」권 93, 열전 한언공)
위의 자료를 통해 볼 때 적어도 고려 목종 4년(1001년) 이전에 본관제도가 성립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이현숙, 1993, 고려본관제 성립의 역사적 추이와 그 성젹, 석사논문, 성신여자대학교
채웅석, 1986, 고려 전기 사회구조와 본관제, 석사논문, 서울대학교
허흥식, 1981, 고려시대의 본과 주거지 <고려사회사연구>
박종기, 1999, 5백년 고려사, 푸른역사
한국역사연구회, 2000,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채웅석, 1991, 본관제의 성립과 성격, <역사비평> 13호
한국역사연구회, 1997, 고려시대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