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개성출토 고려청자의 연구(방병선)
- 최초 등록일
- 2006.09.20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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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강좌미술사』에 실린 방병선씨의 「개성출토 고려청자의 연구」에 대한 요약본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개성과 고려청자
Ⅲ. 출토품의 양상
Ⅳ. 개성출토 청자의 미술사적 의의
본문내용
Ⅰ. 머리말
청자의 최대 소비지이자 집산지였던 개성 지역을 중심으로 한 청자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로는 우선 고려의 王京이었던 개성이 북한 지역에 있는 관계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두 번 째로는 고고학적 발굴 기술과 미술사적 자료 분석이 아직 미흡한 북한의 보고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어렵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연구 대상에서 소외됐던 갈 수 없는 땅 개성의 청자 연구가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길 기대하면서 현재까지 보고된 개성 출토 고려청자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관영 자기수공업과 관련해서 문헌 자료를 보면 전기와 중기의 경우 諸窯直과 六窯直이라는 직급이 보인다. 여기서 六窯는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관영수공업 형태의 청자 생산은 고려 말기에 이르면 司饔에서 관할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매년 각 도에 사람을 파견하여 자기의 감독을 맡도록 하였으나 이에 따른 폐단도 수반되었다. 司饔은 원래 고려 穆宗 연간 尙食局에서, 충렬왕 무렵 司膳署로 바뀌었으며, 다시 공민왕 때에는 상식국, 사선서로 개칭되어 御膳을 담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언제 사옹으로 그 명칭이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위와 같이 개경은 생산의 중심지가 아니라 소비의 중심지여다. 고려에서 생간된 각종 청자들이 이곳으로 집결되었으며 이를 향유하고 감상한 계층들은 대부분 수도인 개경에 상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위 오늘날 명품 청자는 당시도 귀해서 개경의 귀족 계급 모두가 청자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북송의 사절인 徐兢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지은 『高麗圖經』에 의하면 심지어 궁궐 연회에 있어서도 청자는 귀한 물건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대개 소수공업이든 관청수겅업 형태든 개경으로 운송된 그릇들은 왕실에서 소용되거나 신하들에게 下賜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일부 귀족 계급들에게 판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방병선, 「開城出土 高麗靑瓷의 硏究」『講座美術史』17, 2001, pp201~225.